'총수사면' 숙원 해결하려는 정치적 투자인가
알아서 긴다?…재계 일각 "솔직히 무섭다는 분위기" 재벌 대기업의 초대형 투자 계획이 폭풍처럼 쏟아지고 있다. 삼성과 현대차그룹을 시작으로 30일 코오롱그룹과 CJ그룹에 이르기까지 13개 대기업이 발표한 투자 금액은 1100조 원에 육박한다.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재벌 대기업들이 앞다퉈 이렇게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건 전례없는 일이다. 더욱이 지금은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상태)이 우려될 만큼 경제 전망이 어둡다.기업들은 이럴 땐 투자를 미루거나 줄인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31일 "새 정부 출범 때마다 투자 보따리를 풀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에 발맞춘, '진심'어린 팡파르인가, '검찰공화국' 치세가 두려워 미리 드는 '보험'인가. 아니면 5년 만에 '컴백'한 보수정권에 기대 규제 완화, 총수 사면의 숙원을 해결하려는 것인가.
재계 설왕설래를 종합하면 그와 같은 이유들이 중첩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눈치보며 급조한 흔적이 역력하다. 발표하는 방법과 내용, 그 안에 숨은 속내까지 어색한 구석이 많다.
눈치보기·숙제하기식 투자 발표
선착순 달리기를 마치듯 대기업들의 투자 발표에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한시라도 빨리, 급하게라도 발표를 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현대차그룹과 삼성전자가 투자 계획을 발표했던 지난 24일부터 사흘간 롯데와 한화, 두산, SK, LG, GS, 현대중공업, 포스코와 신세계까지 대규모 투자 릴레이가 이어졌다. 칸 영화제 수상 소식이 전해진 30일 오전에는 문화 강국과 사회적 약자 지원을 각각 테마로 CJ그룹과 코오롱그룹의 투자도 발표됐다.
일반적으로 대기업들의 투자 발표는 오전에 발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달랐다. 이를 고려할 겨를도 없어 보인다. 늦은 오후까지 예고 없이 발표가 이어졌다. '다른 곳은 하는데 우리만 안 하면 문제'라는 식의 '눈치보기'와 '숙제하기'가 정서가 그대로 드러났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한 그룹이 발표하니 다들 함께 내놓는 분위기"라며 "다들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으니 동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수부 검사 출신인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 검찰 출신 인사들이 전면 배치된 이번 정부가 '무서워서' 투자를 서둘렀다는 의견도 있다. 또 다른 기업의 관계자는 "솔직히 무섭다는 분위기"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위에 계시는 분들이 어떤 분들이냐. 기업에 대한 (특정한) 시각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기업들이) 가만히 있겠냐"며 "다들 말은 못 하지만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했다.
대규모 투자의 숨은 메시지는 '총수 사면'
더 큰 목적도 있다. 투자와 채용으로 국민 정서를 유리하게 이끌고 정부와도 친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기업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의도도 숨었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인들의 사면이다. '오너 리스크'가 상존하는 대기업들로선 사면이 가장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혹독하게 옥고를 치른 재벌 기업들로선 이를 막기 위한 '보험'으로 수 조 원의 투자도 아깝지 않다는 분위기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사면 논의의 전면에 있다.
이 부회장은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에 동행하기 위해 재판부의 불출석 허가까지 받아야 했다. 삼성은 자발적 의지로 "5년간 미래 신사업에 450조 원을 투자하고 8만 명을 신규 채용하겠다"고 했지만 이를 이 부회장의 사면과 떼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총수가 경영에 복귀한 대기업들도 '친정부'는 필수적이다. 오너들이 범죄자 신분을 벗어난 후에도 오랜 경영 제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최태원 SK회장은 2013년 1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2015년 광복 70주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경영에 복귀했다. 이제현 CJ 회장도 2013년 7월 조세포탈,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2016년 광복절특사로 힘겹게 사면복권됐다.
지난해, 올해에 이르러서야 경영 제약에서 벗어난 경우도 있다.
최재원 SK부회장은 2014년 2월 계열사 펀드 출자금 456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후 2016년 7월 가석방됐다. 그는 지난해 10월에야 취업 제한이 해제됐다. 구본상 LIG그룹 회장도 2012년 사기성 기업어음(CP) 발생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고 2021년에야 LIG넥스원 미등기임원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2014년 2월 부실 계열사 부당 지원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올해에 와서야 취업제한 조치가 풀렸다.
이들 외에도 '외부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기업인들 다수가 사면 복권을 기다리고 있다. 경제5단체는 지난 4월 이 부회장과 신 회장을 포함한 기업인들을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특별사면복권 청원서'를 청와대와 법무부에 제출한 바 있다.
경제 단체들은 8·15 특사를 앞두고 기업인들의 사면을 다시 요청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6월 2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경제단체장들 회동에서도 기업인들의 사면이 거론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다른 메시지는 규제 완화
대기업들의 대규모 투자 이면에는 기업들에게 불리한 규제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도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완화와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철폐, 공정거래법의 형사처벌 규정 축소 등이 대표적이다. 주 52시간 근로제와 최저임금의 조정도 논의 테이블에 있다.
대기업이 주축인 경제 단체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부터 이 사안들을 '기업 활동을 억제하는 규제'로 지적하고 이를 풀어달라고 요구해 왔다.
문제는 이 사안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라는 데 있다. 노동계의 거센 반발은 물론 여론의 벽도 높다. 윤 대통령이 "모든 부처가 '규제개혁부처'라는 인식 하에 기업 활동과 경제 활동 발목을 잡는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해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결과는 아직 미지수다.
재계가 무려 1100조에 육박하는 대규모 투자 보따리로 정부와 민심을 얻고자 했지만 결과는 지켜봐야 한다.
KPI뉴스 / 김윤경 기자 yoon@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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