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문단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해외 전문가들 환호
슬라브문학의 자유로움과 환상성, 활달하게 녹여내
"기관·문학 교수들이 특별한 작가와 작품 편중 지원"
"낯설고 사나운 세상 사는 이들에게 조그만 위로 되길"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문학상으로 각광받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한국 작가와 번역가가 나란히 최종후보로 올랐다. 정보라(46) 소설집 '저주 토끼'와 이 책을 영문으로 번역('CURSED BUNNY'·영국 혼포드스타 출판사)한 안톤 허(41·허정범)가 그 주인공이다. 2016년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와 함께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수상한 이 상은 영어권 밖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번역자와 작가에게 함께 시상한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저주토끼'에 대해 "마법적 사실주의, 호러, SF의 경계를 초월했다"면서 "현대 사회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매우 현실적인 공포와 잔인함을 다루기 위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고 평가했다. '저주토끼'에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의 고통과 부조리를 충분히 떠올리게 하는 10편이 수록돼 있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표제작 '저주토끼'는 저주용품을 만드는 가업을 잇고 있는 주인공이 할아버지에게서 듣는 이야기다. 술도가를 하던 성실한 친구가 술을 빚는 비법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악덕 기업에게 빼앗기고 자살하면서 한 집안은 풍비박산 난다. 할아버지는 개인적인 원한으로는 만들면 안 된다는 가업의 금기를 깨고 저주가 담긴 토끼램프를 만든다. 이 저주토끼는 아이의 뇌를 갉아먹고 서류들을 먹어치우며 급기야 친구를 파멸시켰던 기업과 가족을 파국과 죽음으로 몰아간다.
'머리'에서는 자신의 배설물이 키워낸 기이한 형태의 머리가 변기에서 출몰하고, '차가운 손가락'에서는 죽은 자의 차가운 손이 등장하고, '몸하다'에서는 남자의 씨도 없이 임신한 여성이 핏덩이로 녹아 스러지는 아이를 낳는다. '안녕, 내 사랑'에서는 반려로봇의 공격을 받아 숨지는 인물이, '덫'에서는 황금이 되는 피를 흘리는 여우를 이용해 부자가 되는 남자가 등장한다. '흉터'는 인간 세상의 지배와 착취, 무한 반복 유지되는 그 시스템을 우화적으로 드러낸다. 이밖에도 폴란드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2차세계대전을 공부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와 할아버지 유령('재회'),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법한 인간의 욕심에 대한 이야기('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들이 현란하게 흘러간다.
정보라는 국내 문단에서는 이른바 공식 등단 절차를 밟지 않았고, SF작단 바깥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에 속한다.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코트라 해외 주재원이었던 부친을 따라 해외를 두루 다녔고 출생지도 스웨덴인 안톤 허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온 한국인이다. 교포나 외국인에 비해 한국 정서에 더 익숙한 글로벌세대인 셈이다.
부커재단에서 발표한 1차 후보군에는 정보라 외에도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안톤 허가 번역한 한국작품 2편이 포함됐다. 한국 작품이 두 편이나 후보에 오른 것도 이례적이지만, 수상 후보 번역자가 최초의 유색인종이자 한국인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최종 발표를 앞두고 있는 이들을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부커상 심사위원회에서 '저주토끼'의 '환상적 요소'와 '현대사회 가부장제도와 자본주의 참혹상'을 다뤘다고 평가했다. 동의하는가.
"쓸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단은 진짜 나오는 대로 썼는데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다. 세상의 불의나 부정을 저주해서 나쁜 놈이 망했다고 해도, 그 상황을 겪은 생존자들이 싹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쓸쓸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세상은 여전히 어느 정도는 불의하고 부정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사회라도 그냥 계속 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정보라)
"처음 문장 하나만 딱 읽어보고 이 책은 문체가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읽자마자 영미 독자들에게 너무나도 잘 다가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겠나. 문학성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어서 이 책을 먼저 번역하게 됐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영문판을 출간한 영국 출판사에서도 다른 곳에 뺏기기 전에 빨리 움직이기 위해 비밀리에 열심히 작업했다."(안톤 허)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들을 전개하는 발상은 어떻게 착안하게 됐나.
"사실 내 소설을 읽은 주변 독자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얘기는 화장실에 가면 뭐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이었다. 변비가 생기신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생각이지만,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상 속에서 어떤 장면이나 사물이나 인물을 포착해 출발한다. 거기에서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데, 특히 인물의 경우에는 그 장면이나 주변 정황을 그대로 쓰면 굉장히 모욕이 되거나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최대한 비현실적으로 만들려고 한다."(정보라)
-러시아와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로움과 '환상'은 전공에서 받은 영향도 클 것 같다.
"1920~30년대 소비에트 '빨갱이' '문학'을 전공했다. 이 기간은 혁명 바로 직후의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 예술적인 실험들이 전부 허용되고 국가적으로 장려되기까지 했다. 혁명 직후부터 스탈린주의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하기 전인 10여 년 동안 예술이 정말 자유로웠다. 그런 자유로움, 엉뚱한 상상력이나 창의적인 발상이 너무 좋았다. 슬라브문학의 자유로움과 환상성에 영향을 받았다."(정보라)
-번역할 때 한국 텍스트를 해외 독자들이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이 있는가.
"한국어 자체가 특별해서 번역하기 힘들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한다. 영어도 굉장히 아름답고 굉장히 나름 특별한 언어다. '언어국수주의'적인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그런 시각을 절대적으로 배제한다. 어렸을 때부터 영문학 작품을 포함해 국문학 작품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번역할 때 특별히 어려운 건 없다. 정보라 작가의 문장은 아름다우면서 무섭고, 공포스러우면서 유머러스한 여러 정서가 같은 문장에 깃들어 있다. 이런 문장은 오히려 영어로 번역하기가 더 수월하다. 제인 오스틴('오만과 편견'의 영국 여성작가)이 글을 그렇게 쓰는데,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쉽지 않다. 반어법이라든지 아이러니라든지 이런 상반된 정서 결합 전통이 한국 문학에는 좀 없는 것 같다."(안톤 허)
-한국문학의 지평이 더 넓어지는 계기가 될 것 같다. 해외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번역가로서 해외에서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일을 담당하는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 같은 기관들이나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밀려고 하는 특정 문학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문학 권력이라는 게 확실히 존재하고,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번역가들이 있다. 한국문학에는 시스젠더(Cisgender·자신이 타고난 '지정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느끼는 사람)나 중년 남성의 문학만이 아니라, 여성문학과 SF도 굉장히 풍부한, 정말 풍요로운 문학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같은 작가들 작품만 계속 번역하고, 같은 작가들만 계속 해외에 내보내는 상황이 싫었다. 그래서 와우북페스티벌에 갔을 때도 일부러 SF출판사를 찾았고, '저주토끼'를 만났다."(안톤 허)
-러시아대사관 앞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시위 현장에서 최종 후보 선정 소식을 접했다고 들었다. 우크라이나의 참상도 이후 작품에 영향을 미칠까.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지금 전쟁이나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스물 여섯 나라라고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고 있는 건데, 저라는 한 개인의 능력은 굉장히 미약하다. 제가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를 전공했고, 두 나라 언어하고 굉장히 비슷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어를 읽을 수 있어서 우크라이나 신문을 찾아본다. 아침마다 젤렌스키 대통령 텔레그램도 받아보고 있다. 제가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더 핍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 세상에 고통과 상실은 정말 널려 있다. 당장은 전쟁 이야기가 소설로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생각을 좀 더 해보고, 어떻게 피해자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지 숙고해 봐야 될 것 같다."(정보라)
'저주토끼'에 수록된 작품 중 특별히 "'흉터'에 대해 부커상 심사위원장이 트위터에 소름돋았다고 올렸다"고 안톤 허가 전했다. 그는 "이 작품은 진짜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너무 무서워서 소름이 돋는다"면서 "사실 이런 일은 오늘날 한국사회든 외국이든 매일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흉터'는 소년 시절부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되 동굴에 갇혀 '그것'으로부터 학대를 당해 온몸에 상처가 새겨진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 소년의 뼈를 찢고 골수를 빨아먹었다. 성장한 남자는 어렵사리 탈출해 세상으로 나아가지만, 그곳에서도 인간들에게 사육되고 이용당하다 여자를 구하기 위해 '그것'과 정면대결하는 이야기다. '그것'을 물리치지만, 통상적인 동화처럼 여자와 행복하게 사는 후일담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엔딩이다.
정보라는 "통상 영웅물에서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고 나면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데, 그렇게 공주와 결혼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살아질까 싶다"면서 "과거에 겪었던 모든 경험의 기억,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이 그냥 한 번에 해결이 되나 싶어서 트라우마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최대한 극단적으로 쓴 것 같다"고 말했다.
'저주토끼'는 22개국에서 출간 계약을 맺었거나 검토 중인 상황이다. 북미에서는 랜덤하우스와 하퍼콜린스 같은 굴지의 출판사들이 경쟁한 끝에 '알곤퀸(Algonquin)'에게 출판권이 낙찰됐다. 정보라 장편소설 '붉은 칼'과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도 안톤 허의 번역으로 영국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5월 26일 발표되는 최종 수상 여부도 궁금하지만, 국내 문단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작가가 일거에 세계 유명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현실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해체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논란인 '문학 권력'과 해외 시각에 쉽게 흥분하고 달아오르는 언론과 독자들까지 아우르는, 성찰의 마중물이 그것이다. 정보라가 글로벌 독자들에게 주는 '작가의 말'.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