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다영 조예은 문보영 심너울 박서련 SF중단편 수록
장편 프리퀄 성격, 김희선 강화길 천선란 등 14명 합류
"SF는 게임의 규칙 하나 더 생긴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다른 소설 작업과 SF소설을 쓸 때의 태도에 큰 차이가 없었고, 게임의 규칙이 하나 더 생긴 정도였어요. 새로운 흐름에 탑승하고 싶은 것이 요즘 작가들의 심리 아닐까요. 저희 세대는 전통적이기도 하고 정통적인 문학의 세례를 물론 받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영상물이나 웹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를 접할 기회가 굉장히 많았고, 당연히 영향도 많이 받은 세대라고 생각을 해요. 창작자로서 꼭 기존의 문학만 하고 싶은 작가는 드물 겁니다."
이른바 장르문학으로 치부되던 SF작품들이 독자들의 큰 호응 속에 문단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이러한 흐름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정보라의 '저주 토끼'는 세계 3대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7일 선정됐다. 김초엽이 쏘아올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문학성을 인정받으면서 '순문학' 독자들까지 끌어들여, SF는 새로운 문학의 급류로 떠오르고 있다.
'허블' 출판사에서 장르의 벽을 허무는 SF앤솔로지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 시리즈를 선보인 시도는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이벤트로 보인다. 이 시리즈는 SF를 원하는 작가라면 순문학과 장르문학 불문하고 구상 중인 장편의 속편 격인 중단편을 먼저 써서 선집을 낸 후 차례로 장편을 출간해 작금 SF소설의 새 바람을 본격적으로 견인하려는 기획이다. 그 첫 번째 시리즈에 우다영 문보영 박서련 등 이른바 순문학 계열 소설가 시인이 참여했고, 조예은 심너울이 그동안 써오던 SF로 합류했다. 이들 외에도 김희선 전하영 강화길 천선란 등 14명의 작가가 후속 시리즈를 준비하는 중이다.
'이다음에 지구에서 태어나면'이라는 단편으로 참여한 박서련은 지난 5일 기자간담회에서 "반드시 장편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럼에도 한편의 작품으로서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게임의 규칙으로 이 기획을 받아들였다"면서 "주변의 걱정을 무릅쓰고 등단 무렵부터 SF 성격의 소설을 썼는데, 게임의 규칙 하나 더 생긴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서련의 서사는 '범우주연합Unitied Pancosmo의 개입으로 지구가 우주 외교 시대에 진입한 지는 대략 반세기, 민간인의 관광 목적 방문이 허용된 지는 10여 년이 된' 시점에서 전개된다. 메란드가인은 우주의 행성에 거주하는 생명체 중에서 지구인과 외양은 물론 의식주 양식을 포함한 문화, 심지어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까지 비슷하다. 이 행성의 사후세계가 지구라고 그들은 믿는다. 오손 닐바라는 메란드가인이 지구를 방문, 우주 여행사 직원인 '나'와 함께 지구에서 환생한 누군가를 찾는 과정이 서사의 축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먼 곳에서나마 다시 생명을 얻어 삶을 이어가지만, 그 삶이 자기와는 무관할 거라는 사실,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쌍둥이 한 쪽이 태어날 때 먼저 죽은 '나'의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은 더 절실해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문학의 질문이 새롭게 변주된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를 찾아온 아름다운 외계인'에 끌림을 느끼는 '나'의 속삭임.
'그러니까 닐바,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지구인에게도 메란드가인과 같은 영혼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여기가 메란드가의 천국인지 지옥인지도 답할 수 없지만, 잠깐이나마 내게는 여기가 지옥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고. 그건 당신 덕분이라고.'
김수영문학상(2017)을 수상한 문보영 시인도 첫 SF소설 '슬프지 않은 기억칩'으로 참여했다. 그는 "처음 연락이 왔을 때 마냥 기분이 좋았다"면서 "마침 SF에 푹 빠져 있던 터라서 멋진 작품을 써보고 싶다는 의욕이 있었다"고 말했다. 문보영은 "SF 자체가 세상을 만들어야 되는 건데, 세상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세상을 지어내는 게 쉬워서 재미있었다"면서 "세상을 지어내는 일은 한편으로는 결국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어서 현실 세계를 다시 이해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슬프지 않은 기억칩'은 시인의 감수성이 느껴지는 감성적인 소설이다. 어린 아이의 어떤 기억이 심어진 채 태어나는 로봇들 6명이 모여서 그 기억을 각자 나누며 더 커다란 기억을 빚어 나가는 이야기다. '사라-17은 자신과 같은 기억칩을 가진 로봇들과 공동 기억을 빚는 모임에서 자신의 메모를 읽곤 했다. 공동 기억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책을 같이 읽고 토론하는 것과 유사했다. 같은 기억칩을 가지고 있어도 그들은 저마다의 해석과 감정을 부여하며 서로 다른 유년을 경험했다. 기억 모임의 사라-17들은 편집되었거나 흐려진 기억을 다른 로봇의 기억으로 메우기도 했다.' 사실 인류도 '책'이라는 '기억칩'을 함께 읽으면서 집단 지성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새로운 기억과 발견을 보태는 집단 생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SF라는 외피만 벗기면 오래된 문학의 질문들은 여전히 지속되는 셈이다.
"SF에 한 번에 반했거든요. 굉장히 건조하고 논리적인 문장들을 나열해서 그 문장들의 전개를 집요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떤 충격이나 이해나 정서에 도달해요. 그게 제가 좋아하는 SF의 첫번째 모습이었어요. 그런 방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첫 SF소설을 썼고, 그 다음에 이 소설을 쓰게 됐는데 그 소설도 이 소설도 그리고 앞으로 제가 다음에 쓸 SF 단편도 제가 항상 하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뿐인 거죠."
중편 '긴 예지'로 이 기획에 참여한 우다영은 "SF 쪽에 있는 어떤 소설을 저는 쓰고 싶었고 필요했고, 이 화법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많은 우려와 불안과 공포가 있었지만 일단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독자는 분명히 조금 실망할 수도 있고, 또 저를 모르던 분들은 새롭게 접근하실 수도 있다"면서 "그 모든 과정이 그냥 제가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문학을 하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긴 예지'는 미래를 예측하는 예지 능력을 지닌 이들을 모아 인류의 종말에 대처하는 서사다. '효주'가 돌보던 아이가 '연구소'로 사라진 후 그녀도 특별한 능력이 발견돼 함께 연구소로 가서 예지자 집단과 인류의 미래를 걱정한다. '예지자들의 데이터가 집대성된 레마(인공지능)는 예상대로 순도 높은 예지력을 보였고, 어떤 예지자보다 커다란 미래의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존재 자체가 여러 예지의 중첩 상태였으므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불안정한 미래를 다른 가능성의 미래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종말만은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효주는 수만번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환생하는 시뮬레이션을 거치면서 '우연'이 아닌 필연의 '패턴'을 찾아나선다. 효주가 궁극에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SF라는 방식'으로 써나간 우다영의 변함없는 '문학'인 셈이다.
조예은과 심너울은 SF소설을 써오던 작가. '돌아오는 호수에서'를 선보인 조예은은 오염된 호수가 인간에게 어떤 응징을 하는지 보여준다. 실제 러시아의 오염된 호수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는 "전문 과학 지식이 있는 게 아니라서 상상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도록 전개할지 조금 어려움을 느꼈다"면서 "이 단편 안에서 다 해소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더라도 이후 장편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오미크론 확진으로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한 심너울은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에서 '제노C라고 불리는 미증유의 바이러스가 김포공항 운석 충돌 이후 단 1년 만에 인류 70퍼센트를 감염시키는' 상황을 설정했다. 감염자들은 정확히 4주 동안 체온이 섭씨 39도까지 오르는 심각한 열병에 시달리며,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열이 잦아들면서 일주일간 혼수상태에 빠지고, 마침내 그 혼수까지 견뎌낸 자는 괴물이 된다. 괴물이 된 오빠가 역시 감염된 여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숨가쁘게 전개된다. 소설 속에서 극우인사로 유명한 목사가 "변이는 천국에 갈 사람에게 주는 징표"라며 "짐승의 낙인을 찍을 신체검사도 받지 말라"고 유튜브에서 선동하는 대목은 소설 밖 현실과 흡사해서 실소를 머금게 한다.
이 시리즈를 기획한 김학제 '허블' 편집장은 "시리즈의 제목이자 책의 제목에도 포함된 '초월'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음(超越)' 그리고 '초승달(初月)'이라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면서 "그 어떤 위계와 배제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제 막 탄생한 작가의 세계가, 초월에서 만월이 되듯, 완전하고 환하게 사랑으로 차오르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수록된 작품들에서 공통으로 사랑을 발견했다는 박서련의 말.
"통상 문학에서 개인의 내면세계가 먼저 있고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가 중요한 것이라면, SF에서는 세계와 인간이 동등하게 먼저 등장한다고 생각해요. 세계가 어떤 주인공의 내면만큼이나 중요해서 세계에 대한 질문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조금 다른 세계가 SF의 세계관이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독자나 작가가 알고 있는, 기존 세계와 다를 것 없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그 세계에서도 굉장히 낯익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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