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이제 서로 고요한 쪽으로 놓아줄 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2-03-10 10:48:25
새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 산문집과 함께 펴낸 문태준
제주에 내려가 살면서 건져 올린 짧고 선명해진 시편들
'항아리'에 쌓인 시간 들여다보며 시를 살아내는 '생활'
세계 곳곳은 진흙으로 쌓아 지은 제비집, '사랑의 둘레'
"혐오와 분노로 가득한 세상, 서로 고요하게 배려할 때"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구는 탄식한다. 절반은 의기양양하고, 절반은 한숨짓는다. 혐오와 분노는 여전하다. 고요한 쪽으로 마음 돌려 심호흡이 필요한 때다. 그 고요 속에서 자신과 세상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자세가 절실하다. 문태준 시인이 최근 동시에 펴낸 여덟 번째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창비)와 계절별로 묵상하듯 써내려간 산문집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마음의숲)를 들추어보는 배경이다.

▲새 시집과 함께 산문집을 펴낸 문태준 시인. 그는 "고요한 쪽이란 평화와 안심과 안정이 있는, 위해가 없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그런 곳"이라고 말한다. [마음의숲 제공]

'혹한이 와서 오늘은 큰 산도 앓는 소리를 냅니다/ 털모자를 쓰고 눈 덮인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피난하듯 내려오는 고라니 한 마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라니의 순정한 눈빛과 내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추운 한 생명이 추운 한 생명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눈길)


 눈 덮인 산속에서 폭설을 피해 내려온 고라니와 마주쳤다. 혹한 속에서 상생하는 길은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추운 한 생명이 역시 춥기는 마찬가지인 한 생명에게 '고요'를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문태준은 "고요한 쪽이란 평화가 있는, 안심과 안정이 있는, 위해 같은 게 없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그런 곳"이라고 남쪽 섬에서 전화로 말했다.

문태준은 2년 전 제주로 내려가 지난해 거주민이 많지 않은 애월 중산간 지역에 집을 짓고 들어갔다. 낮에는 시내로 나가 '생활'을 하고 저물 무렵이면 해안도로를 타고 돌아와 종소리를 들으며 '목깃이 까매진 저녁'을 씻는다. 휴일에는 작은 귤밭도 돌보고 채마밭에서 돌을 고르며 풀을 뽑는다. 4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는 제주의 종소리와 자연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해 질 무렵이면 종소리가 옵니다 내 사는 언덕집에 밀려와 곱게 부서집니다 나는 이 종소리를 두고 숨어 살 수가 없어 손 놓고 아무 데나 걸터앉아 있습니다 (…) 며칠 전에는 종소리가 오는 곳을 찾아 나섰다가 도중에 길머리에서 돌아왔습니다 종소리는 목깃이 까매진 나의 저녁을 씻깁니다 그리고 종소리는 내내 남아 잠든 아이의 방을 둘러보고 가는 어머니처럼 나의 혼곤한 잠 속을 맴돌다 갑니다'(종소리)

애월읍 장전리 시인의 집 근처 어딘가에 절집이 있는 모양이다. 그곳에서 새벽과 저녁 무렵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저녁에는 말 그대로 '생활'의 때를 씻어주고, 새벽에는 시인이 서재에서 첫 문장을 기다릴 때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갖추게 만드는 죽비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는 "절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은데 가보지는 못했다"면서 "성당이든 교회든 종소리를 들으면 종교적인 경건함, 엄숙함 같은 묘한 느낌이 드는데 눈보라 치는 깜깜한 새벽에 들으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은 '종소리'와 더불어 '항아리'와 '돌 그림자'가 기둥이다.
'내게는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지난봄에 동백나무 아래 놓아두었습니다 항아리는 멀뚱멀뚱 앉아 있습니다 어두워져도 날이 어두워진 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항아리는 제 몸에 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그제는 물 괸 항아리의 수면에 살얼음이 얹혀 있었는데 오늘은 날이 풀려 잔잔하게 물결이 흐릅니다 나는 조용하게 일어나는 그 맑은 물결 같은 말씀을 기다려 항아리 옆에 앉아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산까치 한마리가 항아리에 앉아 있다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전날에는 가랑잎의 말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훨씬 전날에는 일어난 구름, 사랑, 실바람과 풍설(), 질긴 장마, 무서리, 그리고 동백꽃이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네 사람이 내 집에 찾아와서는 항아리 속이 궁금해 들여다보다 그만 수면 아래로 얼굴이 아주 들어가고 만 일도 있었습니다 항아리는 제 몸속으로 들어간 이들의 명부(名簿)를 갖고 있지만 그마저도 가라앉혀놓았으니 그 이름들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나는 오늘 항아리 옆에 앉아 항아리처럼 입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 아, 아, 탄복하는 소리도 내고 내 갑갑한 속을 떠올려 응아응아, 우는 소리도 냅니다 그래도 항아리는 한 말씀도 없으시니 나를 항아리에 쏟아붓습니다만, 늘 그러하듯 제 몸에 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앉아만 있습니다'(항아리)

이사할 때마다 어머니가 물려준 항아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제주까지 모시고 와 돌밭에 놓아둔 항아리에 빗물도 쌓이고 눈발도 녹아서 물이 가득 찼다. 그는 "항아리라는 공간은 그냥 단순한 하나의 항아리가 아니라, 많은 것들의 '쌓임'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세계인 것 같다"면서 "이 쌓임은 어떤 개체와 존재들이 유대한 쌓임,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이 시간들의 쌓임이 항아리라는 한 몸에 다 갖춰져 있다는 그런 생각"이라고 말했다. 산문집에는 보다 구체적인 항아리에 대한 생각이 담겼다.

'항아리를 바라보면 채우는 일과 덜어내는 일, 혹은 비우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격정적인 것과 고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항아리를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잠깐잠깐씩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되기도 한다. 물건이지만 오랜 시간 정을 붙이고 마음을 주고받다 보면, 하나의 물건은 단순한 물건 그 자체가 아니게 된다. 공부와 수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항아리가 그러하다.'

항아리에서 발견한 '쌓임'의 우주는 '돌 그림자'에도 스며있다. 그는 누군가 옮겨놓은 큰 돌을 매일 바라보면서 돌에 붙어 사는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림자 속에는 잘바당잘바당 떨어진 것들이 괴어 있었지요 돌 그림자 속에는 빗방울의 춤과 풀씨와 배어든 햇살의 윤(潤)과 죽 둘러선 그 안쪽 모양새의 미(美)와 옮겨놓은 이의 마음과 지난밤 달빛이 고이고 고여서 검은 손을 맞잡고 서로서로 무언가 말을 조곤조곤히 나누고 있었지요' 이성복의 '남해 금산' 돌 속에 묻혔던 한 여자도 저들 중 하나로 스며들었을까.

▲제주 불교방송에서 일하는 문태준은 제주 시내로 출근해 '생활'을 한 뒤, 애월읍 장전리 서재로 돌아와 '목깃이 까매진 저녁을 씻고' 새벽이면 종소리를 들으며 첫 문장을 기다린다. [문태준 제공]

이번 시집은 '꽃'으로 문을 연다.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꽃) 그는 "사람들 내면이 지금 어쨌든 많이들 힘들 때인데 꽃이라는 공간은 입체적인 기쁨과 환희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꽃의 내면이 우리들 마음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 꽃은 다시 '꽃과 식탁'으로 변주된다. "내게 꽃은 생몰연도가 없네/ 옛 봄에서 새봄으로 이어질 뿐// 꽃아/ 너와 살자// 우리의 가난이 마주 앉은 이 저녁의 낡은 식탁 위/ 꽃은 신(神)의 영원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네" 꽃에게는 살고 죽는 경계가 없고, 옛 봄에서 새 봄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시인은 우리도 그 꽃처럼 살아보자고 말한다. 그는 "작년 연말에 튜울립 수선화 같은 꽃 구근들을 심었는데 그것들이 오리 부리처럼 막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생명이 갖고 있는 경탄할 만한 힘을 우리 내부에서도 끌어올렸으면 좋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옛 봄에 이어 탄생시킨 새 봄은 시로 불을 붙인 작은 촛불이다. '어린 고양이가 처음으로 담을 넘보듯이/ 지난해에 심은 구근(球根)에서 연한 싹이 부드러운 흙을 뚫고 올라오네// 장문(長文)의 밤/ 한 페이지에 켜둔/ 작은 촛불'(새봄) 

문태준은 지난해 여름 아내가 태어나 살았던 생가 자리에 지은 집으로 이사했고, 그 옆에는 한라산과 애월 바다가 보이는 '오롬마르'라는 카페도 열었다. 가족과 함께 제주로 이사 온 첫 1년은 '광평빌라'에서 연세(年歲)로 살았다. 육지에서는 시골에 가도 제비들이 흔치 않은데 제주에서는 유난히 제비들이 많이 보였다. 제비집에서 '사랑의 둘레'를 발견했다. '제비 가족을 보러 광평빌라에 갔다 제비집에 제비들이 없었다 내부가 대낮처럼 텅 비었다 사랑의 둘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 곳곳은 진흙을 쌓아 지은 제비집 아닌가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야 제비집에 어떻게 오목하게 환하게 상공(上空)이 담기겠는가'(제비2). '이 세계 곳곳은 진흙으로 쌓아 지은 제비집'이라는 성찰은 울림이 크다. 사랑으로 지은 그 제비집을 무참하게 한순간 전쟁으로 파괴하는 곳도 이 세상이니, 더 많은 제비집을 짓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문태준은 "눈보라가 치는 꿈속을 뛰쳐나와 새의 빈 둥지를 우러러 밤처럼 울었다"고 '이별'에 썼다. [마음의숲 제공]

등단 30년을 목전에 둔 문태준에게 시는 어떤 존재일까. 그는 "시골에서 살면서 저에게 말을 건네 오는 시들을 그냥 소박하게 그때그때 잘 받아 적었으면 좋겠다"면서 "애월 장전이라는 동네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촌락이지만 여기서 전해 듣는 말씀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세계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시는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는 대상"이라며 "시는 여전히 말문을 터주는 느낌인데, 시가 고요한 쪽으로 데려가는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고요한 쪽으로 건너가고 싶을 때 유용한 도구, 따스하다.

'오늘은 세상이 날콩처럼 비려서/ 세상에 나가 말을 다 잃어버려서// 돌아와 웅크려 누운 사내는/ 사다리처럼 훌쭉하게 야윈 사내는// 빛을 얇게 덮고 일찍 잠들었네// 초저녁별 나오시니/ 높고 맑은 다락집에서 기침하며 나오시니// 물그릇 같은 밤과/ 절거덩절거덩하는 원광(圓光)'(초저녁별 나오시니)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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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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