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보험업계 전산화 요구 높지만, 의료계 반발에 10여년째 논의만 10여 년째 공회전 중인 실손의료보험 보험금 청구 간소화 법안이 의료업계의 반발 탓에 올해도 국회 문턱을 넘기 힘들 전망이다.
지난 17일 국회 정기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원회 회의에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를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이 상정됐으나 실제 논의는 이뤄지지 못한 채 회의가 마무리됐다. 오는 23일 열리는 법안심사 소위에서도 논의되지 못할 경우 연내 통과는 무산되는데, 제대로 논의될 것 같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도입은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 이후 10년 넘게 추진돼온 해묵은 과제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청구할 때 의료기관에 요청해 전산으로 바로 청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골자다. 지금은 실손보험금을 청구하려면 증빙서류를 종이로 발급받아 제출해야 한다.
국회 임기마다 관련 법안이 발의되고 있으나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로는 의료업계의 반발이 꼽힌다.
의료계는 개인의료정보가 민간보험사로 유출돼 보험사의 이익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법안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약사회는 지난 9월 27일 공동성명서를 내고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도입으로 환자의 진료정보, 즉 개인의료정보를 민간보험사에 전송하는 것은 단순히 자료를 전자적 방식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개인의료정보를 전산화함으로써 방대한 정보를 손쉽게 축적 및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에 그 위험성이 목적에 비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개인의료정보를 축적한 민간보험사는 이를 보험금 지급거절, 보험가입 및 갱신 거절, 갱신시 보험료 인상의 자료로 사용할 것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의협 관계자는 "보험사들은 지금도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기록 등을 달라고 심평원에 요구하고 있는데 전산화가 도입되면 보험사들이 의료정보를 영리 목적으로 이용할 여지가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영리기업에 개인의료정보를 넘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자꾸 보험사에 정보를 넘기려고 하는 것인지 그 배후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법안 소위에서 일부 위원들이 의료업계의 눈치를 보는 듯한 발언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은 "김희곤 위원님이 말씀하셨지만 이것을 시행하는데 의사협회, 한의사협회 등 의료인협회들이 대부분 다 반대하고 있다"며 "이쪽에서 반발이 커져서, 실질적으로 여기의 저항이 거세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신지…"라고 발언했다.
결국 의료업계의 반발이 워낙 거세다보니 국회의원들도 '뜨거운 감자'에 손대는 걸 꺼려해 법안 통과가 자꾸 무산되는 모양새다.
안타까운 부분은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는 소비자의 권익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금융소비자연맹, 소비자와함께, 녹색소비자연대, 서울YMCA, 소비자권리찾기시민연대, 한국소비자교육지원센터 등 소비자단체가 최근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2년 이내에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었음에도 청구를 포기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가 전체의 47.2%에 달했다.
이들이 청구를 포기한 금액은 30만 원 이하의 소액청구건이 95.2%였다. 보험금 청구 포기의 가장 큰 이유는 "증빙서류를 종이로 발급받아 제출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고 귀찮아서"였다. 보험금 청구 시 전산 청구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78.6%로 집계됐다.
도규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금 이 문제를 10년간 논의해 왔다"면서 "(청구 간소화가) 된다면 실손보험 상품도 맞춤형 상품 개발이 가능해지고 보험소비자, 특히 국민들에게는 훨씬 득이 된다"고 강조했다.
보험연구원 정성희 연구위원·문혜정 연구원도 보고서를 통해 "실손보험은 전 국민의 약 75%(2020년 3월 피보험자 기준 3864만 명)가 가입하고 있고 연간 청구 건이 1억 건 이상(2020년 1억626만 건)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실손보험의 청구전산화는 사회적 편익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험업계 역시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청구 간소화 시 소액의 보험금 청구가 늘어나겠지만, 대신 서류 처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지금 연간 8000만 건에 이르는 실손보험금 청구 건을 일일이 서류로 받아 수기로 입력하고 있다"며 "실손보험 가입자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서류 처리에 드는 시간과 비용도 급증하고 있기에 이를 전산화하는 것은 상당한 이득"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보험업계와 소비자단체에서는 이미 관련 의료 정보를 보험사들이 서류로 받고 있으므로 의료업계의 반발 근거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손해보험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보험가입자에게 종이 서류에 적힌 개인 의료정보를 받아서 전산으로 입력하고 보험금을 지급하고 있다"면서 "전산화가 되면 행정 비용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배홍 금융소비자연맹 보험국장도 "요즘 같은 시대에 클릭 한 번으로 끝날 일을 지금과 같이 번거롭게 서류를 떼야 하는 것은 결국 의사들이 법안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배 국장은 "의료업계에서 개인의료정보 노출을 들먹이는데 실질적인 이유는 의료 수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비급여 진료비가 노출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발의된 관련 법안 5개 중 일부 법안은 전자적 전송 업무를 하는 위탁기관을 건강보험심평원으로 정하자고 명시하고 있다. 의료계에서 중계기관인 심평원이 의료 정보를 들여다보고 의료비 적정성 심사에 활용할 수 있는 점을 걱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평원이 의료비 적정성을 문제삼으면, 의사들의 수입은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의료기관들의 서류 발급을 통한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의료업계의 진정한 반대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9월 28일 열린 정무위 법안 소위 회의록을 보면, 도 부위원장은 의료업계의 반발 이유에 대해 개별 증빙서류, 진단서 발급과 관련해서 서류 발급 비용으로 약 2000억 원 정도의 의료기관 수입이 발생하고 있는 점을 거론했다. 그는 "전자 방식으로 바뀌게 되면 종이 발행이 안 되기 때문에 무료 내지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아 의료기관의 수입이 감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KPI뉴스 / 강혜영 기자 kh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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