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안보지수 195개국 중 193위 취약국이면서도 백신 거부
북한 주민들, 봉쇄에 불만팽배 "코로나로 죽으나 굶어죽으나 매한가지" 북한의 관영매체이건 대외 선전매체이건 모든 기사 작성에서 불변의 규칙이 있다.
기사 리드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현실을 진단하고 바로 그다음에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에 대한 개선책이나 문제 해결의 해법은 늘 최고지도자 동지의 '말씀'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말씀' 속에서 답을 찾는다는 선전선동의 규범을 따라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4일자 '겨울철조건에 맞는 방역대책을 빈틈없이 세우자' 제목의 기사도 예외 없이 이런 규칙이 적용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기사의 앞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적인 악성 전염병사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감염력이 강한 변이비루스(바이러스)들이 세계의 많은 나라와 지역으로 전파되고 있는 속에 감염력이 보다 강한 새로운 변이비루스가 발생하여 국제적 우려를 증대시키고 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당에 있어서 인민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며 전체 인민이 건재하고 건강해야 당도 있고 국가도 있고 이 땅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방역형세는 우리들로 하여금 비상방역사업을 더욱 강도높이 벌려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사람들의 면역력이 약해지고 악성비루스의 생존력이 강해지는 겨울철에 그 어느때보다도 각성하여 방역대책을 철저히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북한 선전 당국이 '탕개를 늦추지 말고 비상방역전을 강도높이'라는 부제를 단 이 기사처럼, 김정은의 어록을 인용해 긴장을 늦추지 말고 비상방역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탕개'는 본디 남북한 모두에 있는 말로 '물건을 동이거나 죄는 물건'을 뜻한다. 하지만 북한 조선말대사전은 '죄여지는 마음이나 긴장성'이라는 뜻을 하나 더 수록하고 있다. 즉, 북한에서는 주로 '긴장'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문제는 북한 주민들이 밑줄 치며 읽는 관영매체가 잘못된 정보까지 주입하며 보건 담당 성원들과 주민들을 과잉 비상방역으로 내모는 데 있다.
노동신문은 위 기사에서 "특히 겨울철에 내리는 눈을 통해서도 악성비루스가 유입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이에 대한 방역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성비루스(바이러스)는 북한에서 '코로나19'를 일컫는다. 이 신문은 "모든 지역, 모든 단위에서는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철 조건에 대처하여 비상방역사업에서 사소한 공간이나 허점이 없겠는가를 다시 한번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면서 이같이 주문했다.
겨울이면 내리는 눈조차도 경계해야 한다며 '물샐 틈 없는' 아니 '눈샐 틈 없는 밀봉방역'을 강조한 것이다.
노동신문은 지난해 12월에도 산림 관리국에서 "벌목공들이 악성비루스가 눈을 통해서도 유입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눈이 내릴 때 방역 규정을 보다 엄격히 준수하도록 각성시키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리었다"고 눈을 통한 전파 가능성을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대부분 공기중 비말 감염을 통해 전파된다는 것이 그동안의 연구 결과이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는 COVID-19의 주요 전파 경로를 이렇게 세 가지로 꼽고 있다.
△바이러스가 들어있는 비말이나 작은 입자를 내뿜는 감염자 가까이에서 공기를 들이마실 때 △바이러스가 들어있는 비말이나 작은 입자가 다른 사람의 눈, 코, 입에 묻을 때, 특히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 튀는 경우 △바이러스가 묻은 손으로 눈, 코, 입을 만질 때
그런데도 북한이 이런 황당한 주장을 거듭 주장하는 데는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김정은 위원장이 극단적인 국경 봉쇄와 모든 생물체의 지역간 이동을 제한하는 봉쇄정책으로 대응한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해법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이러한 황당한 주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도 북한은 평양의과대학 교수의 조선중앙TV 인터뷰를 통해 "악성 바이러스는 철새나 겨울철 눈발을 통해 유입될 수 있다"면서 눈을 통해 코로나가 유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중국에서 넘어오는 황사에도 코로나가 묻어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북한 매체들은 중국으로부터 날아오는 황사를 통한 코로나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야외 공사를 멈추고 실내에 머물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지난 5월에는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의식한 듯, "이상기후 현상과 계절 조건"을 들먹이며 '바람에 날아가는 이상한 물건'이 코로나19 유입 경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는 지난달 5일 북한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방역사령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코로나 비루스(바이러스) 행동수칙에 대한 긴급 재 포치(지시)를 하고 있다"면서 코로나 방역 행동수칙을 긴급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긴급 전달된 준수 사항에는 기존에 강조해오던 △소독, 마스크 착용 등 사회적 거리 두기 의무화 유지 △조류, 야생짐승과 접촉 금지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의심되는 풍선이나 이상한 물건, 출처가 불명한 물건을 발견하면 손대지 말고 신고해야 할 것 등이 포함됐다.
이런 까닭에 북한이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까지 비상방역을 강조하는 것은 장기간의 국경봉쇄로 경제 위기와 식량난이 가중되는 가운데 코로나 국면을 활용해 주민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토마스 오헤아 퀸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도 최근 유엔총회의 북한 인권 상호대화에 출석해 "북한 당국이 코로나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 진입자를 사살하는 등 가혹한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국경 봉쇄와 더욱 엄격한 이동 통제는 북한 주민들의 식량 등 생필품 확보에 필수적인 시장 활동에 충격을 줬다"고 지적하며 북한 당국의 엄격한 코로나 방역조치에 우려를 표했다.
더구나 북한은 보건 안보 역량이 전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지는 취약 국가인데도 유엔과 국제기구의 인도적 지원조차도 거부하고 있어 이런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 '존스 홉킨스대 보건안보센터'가 지난해 발표한 '2019 글로벌 보건안보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보건안보 역량은 전체 195개국 중 193위로 가장 취약한 국가로 분류된다.
북한은 중대한 질병의 발생을 예방, 탐지,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 세계보건안보 지수에서 17.5점을 기록해 아프리카의 적도 기니, 소말리아에 이은 최하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9위, 중국은 51위였다.
하지만 유엔아동기금(UNICEF)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정부는 지난 9월 코로나19 백신 분배 국제협의체인 '코백스'(COVAX)에서 배정받은 약 300만회분의 백신을 다른 국가에 재배정해 달라며 수령을 거부한 바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COVID-19 대쉬보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1월 3일 오후 5시 21분(중부유럽표준시 기준) 현재 WHO에 보고된 사망자 501만2337명을 포함해 2억4747만2724명의 확진 환자가 발생했다. WHO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코로나 제로' 국가는 투르크메니스탄과 북한, 두 나라뿐이다.
COVID-19 대쉬보드에 따르면 10월 31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총 68억9386만6617회 분량의 백신이 투여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단 1회분의 백신도 투여되지 않은 '백신 제로'인 나라도 에리트레아(Eritrea)와 북한, 두 나라뿐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재국가인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통한다. 인구 608만 명(2019, CIA)에 1인당 GDP는 288달러(2020, IMF)인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에서 '북한보다 더 북한 같은 나라'로 불릴 만큼 폐쇄적인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다.
결국 WHO 집계상으로 '코로나 제로'에 '백신 제로'인 나라는 지구상에서 북한뿐이다. 물론 '코로나 제로'는 WHO가 현지 실사로 조사한 게 아니고 북한 보건당국이 보고한 것이다.
북한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전지전능한 김정은의 '말씀'대로 '눈 샐 틈 없는 밀봉방역'을 고수하며 지구상에서 유일한 '코로나 청정국'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코로나로 죽으나 굶어죽으나 매한가지라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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