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보행자 우선권' 무시하는 한국 운전자들

김해욱 / 2021-06-29 16:23:14
"지나가는데 왜 이렇게 빵빵 거려?"

여의도 한국거래소 근처 횡단보도를 지나려던 한 행인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횡단보도에 막 들어선 순간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접근했기 때문이다. 보행자와 운전자는 날선 언쟁을 벌였다.

이 행인은 특별히 무례한 운전자를 만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지난 29일 오전11시~오후1시, 약 2시간 동안 기자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들어섰을 때 횡단보도에 접근한 342대의 차량들을 관찰했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편하게 건너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발을 디딘 상태에서도 일단정지를 하지 않은 차량이 무려 75%(252대)에 달했다. 횡단보도에서는 차량보다 보행자에게 통행 우선권이 있지만 현장에선 거의 무시되고 있었다. 

조사 대상 차량 중 40%(132대)는 보행자가 먼저 지나가도록 양보했지만 완전히 멈추진 않고 서행하며 횡단보도로 접근했다. 거리를 좁혀오며 보행자에게 빨리 건너가라고 재촉(또는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지난 29일 여의도 한국거래소 인근 횡단보도에서 한 택시가 횡단보도로 지나치자 보행자들이 택시를 피해 길을 건너고 있다. [김해욱 기자]


위험한 장면도 목격됐다. 한 차량은 횡단보도에 진입하면서 오히려 속도를 높여 보행자들이 뒷걸음치게 만들기도 했다. 한 택시는 보행자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다 여의치 않자 횡단보도 가운데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처럼 보행자들이 진입하는 것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차량이 약 35%(120대)에 달했다.

지난해 9월에는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너간다는 이유로 택시기사가 20대 여성 보행자를 폭행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도로에선 차가 주인'인데 왜 꾸물거리냐는 그릇된 인식을 보여준 사례였다.

현 도로교통법은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진입 시 차량은 정지선에 멈춰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를 어기면 범칙금 6만 원이 부과된다. 교통사고가 나면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으로 '12대 중과실'에 해당돼 보험처리 여부와 관계없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한 A(55) 씨는 "미국에서는 사람이 있건 없건 무조건 횡단보도 정지선에서 일단정지를 하지 않으면 벌금 티켓을 받는다"면서 "사람이 뻔히 길을 건너고 있는데도 위협하듯 다가오는 차량을 대할 때마다 교통법규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심된다"고 언성을 높였다.

기자가 관찰하던 횡단보도를 자주 이용한다는 B(41) 씨는 "횡단보도로 접근하는 차량 대다수가 완전 멈춤을 하지 않고 슬금슬금 다가온다"며 "늘 불쾌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보행로 안전 의식 부족은 통계에서도 반영된다. 2017~2020년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자 비율은 약 4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0.5%의 2배에 달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보행자가 있으면 횡단보도 전 정지선에서 일단정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운전자가 적은 것이 현실"이라며 "보행자 우선을 인식시키는 안전교육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운전자와 보행자가 서로 기분좋게, 안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은 법규를 잘 인식하고 이를 철저하게 준수하는 길 외에는 없다. 

KPI뉴스 / 김해욱 기자 hwk1990@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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