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가상화폐 실명계좌 '면책기준' 요구…'100% 배상' 우려

안재성 기자 / 2021-06-14 15:43:15
손해배상 책임 '덤터기' 염려…국민·하나·우리 실명계좌 제공 안할 듯
"책임 떠넘기기에 은행 '뒷걸음질'…거래소 100여곳 폐쇄 현실화하나"
오는 9월부터 은행에서 실명인증 계좌를 제공받은 가상화폐 거래소만 정상영업이 가능한 가운데 은행권이 금융당국에 실명계좌에 대한 명확한 '면책기준'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준에 맞춰 발급된 가상화폐 실명계좌에 한해서는 후일 금융사고가 터져도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이는 '사모펀드 사태'처럼 투자자 피해를 100% 배상하라는 요구가 또 나올까봐 염려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미 몇몇 은행이 가상화폐 실명계좌를 제공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는 등 실명계좌 제공을 몹시 꺼려하고 있다. 때문에 면책기준이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 100여 곳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 가상화폐 실명계좌 발급과 관련해 은행이 면책기준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칫 발생할 수 있는 무한책임을 염려하는 것으로 풀이된다.[셔터스톡]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와 유관기관들이 꾸린 가상화폐 거래소 관련 태스크포스(TF)에서 은행들은 실명계좌 발급에 관한 면책기준 설정의 필요성을 최우선 과제로 논의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가상화폐 거래 실명계좌 발급을 위한 은행의 실사·검증 과정에서 은행의 과실이나 책임 사유가 없다면 향후 금융사고가 발생해도 은행의 책임을 묻지 않는 면책기준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면책기준의 필요성을 금융당국에 전달했으며, 논의가 시작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은행들은 면책기준이 없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책임에 대해 상당히 민감한 모습이다. 국민·하나·우리은행 등은 관련 책임을 피하기 위해 아예 가상화폐 거래를 위한 실명계좌를 제공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실명계좌를 제공하고 있는 신한은행, NH농협은행, 케이뱅크 등 면책기준 설정 여부에 따라 발을 뺄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은행이 가장 우려하는 건 사모펀드 사태처럼 대형 금융사고가 터졌을 때 또 다시 은행이 투자자 피해를 100% 배상하라는, 무한책임 요구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상화폐는 아직 제도화가 덜 된 데다 감독 사각지대라 사고가 빈발하기 쉽다"며 "사고가 발생하면, 결국 은행의 실명 인증을 믿고 거래했다는 점을 근거삼아 은행에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럴 때마다 100% 배상을 요구받으면, 은행이 견디기 힘들다"며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가상화폐 거래를 위한 실명계좌를 발급하느니 차라리 손을 뗄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화폐가 돈세탁에 악용되는 경우도 잦다보니 '세컨더리 보이콧'도 걱정된다. 세컨더리 보이콧이란 미국이 제재하는 국가와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이나 금융기관까지 제재하는 것을 뜻한다. 가상화폐가 범죄조직의 돈세탁에 악용될 경우 미국 정부의 세컨더리 보이콧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세컨더리 보이콧 대상이 된 금융기관은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 금융망 접근 차단 등의 제재를 받는다. 미국 금융망 접근이 차단된다는 것은 달러 거래를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실상 은행 입장에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실제로 과거 IBK기업은행은 자금세탁 관련 이란 제재 위반으로 미국 검찰 및 뉴욕주 금융청으로부터 1049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았었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은 세컨더리 보이콧에 걸려 파산했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애초에 은행 실명계좌 발급을 가상화폐 투자자 보호 조건으로 건 것부터가 금융당국이 책임을 은행에 떠넘기려는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개정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가상화폐 거래소는 오는 9월까지 고객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계좌를 받아 신고해야 한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처음에는 "가상화폐 거래를 보호할 수 없다"고 하다가 "신고된 거래소에서 거래하는 투자자들의 투자금은 자연스럽게 보호될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은행권에서는 이를 결국 은행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의도로 의심하고 있으며, 무한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면책기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면책기준 설정 요구를 쉽사리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면책기준을 만들 경우 책임 대상이 은행에서 금융당국으로 전환된다"며 "실거래 규모나 투자자 신원조차 파악하기 힘든 가상화폐 시장에 대해 금융당국이 그토록 무거운 책임을 감수할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만약 면책기준이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 은행이 실명계좌를 제공하지 않아 가상화폐 거래소가 대거 폐쇄될 가능성이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가상화폐업계에서는 국내 거래소가 10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중 은행에서 실명계좌를 제공받고 있는 거래소는 단 네 곳 뿐이다.

업비트는 케이뱅크, 빗썸과 코인원은 NH농협은행, 코빗은 신한은행과 각각 실명인증 계좌 발급 계약을 맺고 있다.

그 외 거래소들은 대부분 거래소 명의 법인계좌 하나만 발급받은 뒤 그 계좌를 통해 다수 투자자들의 입출금 등을 처리하는, 이른바 '벌집계좌'로 운영하고 있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오는 9월부터는 은행이 실명계좌 제공을 거절할 시 개정 특금법에 따라 가상화폐 거래소 운영이 불가능해진다"며 "정말로 100곳 이상이 문을 닫아 가상화폐 시장 자체가 큰 혼란에 휩싸일 수 있다"고 염려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면책기준이 설정될 경우 국민·하나·우리은행도 입장을 바꿔 실명인증 계좌 제공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는 "신한은행, 농협은행 등도 발을 뺄 수 있다"며 "4대 가상화폐 거래소라고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KPI뉴스 /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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