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실미도 사건 50주기 - ② 실미도 공작원 임성빈 씨 유족 인터뷰
제적등본엔 1969년 11월20일 사망 기록…사형일은 1972년 3월10일
사망 신고자는 아버지 이름…"제적등본에 찍힌 도장, 아버지 것 아니다"
1968년 4월 1일 31명으로 창설된 북파공작원 훈련소 '실미도 부대'. 실미도 공작원 가운데 7명은 혹독한 훈련을 받던 도중 사망했다. 1971년 8월 23일 남은 24명은 "중앙청이나 사령부로 가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자" 결의하고 실미도 탈출을 시도했다. 이들은 서울 대방동 삼거리에서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2명, 민간인 6명, 실미도 공작원 20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공작원 4명만 살아남았다.
1972년 3월 10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 공군 2325부대 안에서 생존 공작원 4명의 사형이 극비리에 집행됐다.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7개월 만에 수사, 재판에 이어 사형까지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암매장됐다. 군 당국은 암매장지에 대해 침묵했다.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족들은 유골은커녕 암매장지조차 찾지 못했다.
▲ 실미도 공작원 임성빈 씨의 유족 임일빈(왼쪽) 씨와 임충빈 씨가 24일 서울 여의도 UPI뉴스 본사 회의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 24일 오후, 사형당한 실미도 공작원 4명 가운데 한 명인 임성빈 씨의 동생 임일빈·임충빈 씨를 서울 여의도 UPI뉴스 본사에서 만났다. 임성빈 씨는 3남5녀 가운데 종갓집 장손이자 장남이었다. 일빈, 충빈 씨는 임성빈 씨의 여동생이다. 이들 자매는 53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20대 시절 오빠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68년 봄 어느 날 "큰돈을 벌어오겠다"며 대문을 나선 임성빈 씨는 죽어서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부친은 사라진 아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꼬깃꼬깃 구겨진 아들 사진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 실미도 공작원 임성빈 씨 모습. 임성빈 씨의 부친은 평생 그의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다. [임일빈·임충빈 씨 제공]
임일빈·임충빈 씨는 "50년 넘게 구천을 떠돌고 있는 오빠, 눈감는 순간까지 오빠를 그리워했던 아버지, 오빠의 유해만이라도 찾고 싶은 가족. 실미도 사건으로 모두가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27일 본격적으로 조사활동을 시작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임성빈 씨의 유해를 찾고 꽁꽁 감춰져 있는 실미도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50년이 지났다. 당시 임성빈 씨가 어떻게 실종됐는지 기억하시는지.
(임일빈)"당시 우리 자매는 10대였고 오빠는 장남이어서 나이 차이가 꽤 있었다. 오빠는 실미도에 끌려갔을 때 22살이었다. 2006년 국방부 조사기록을 보니 오빠는 1968년 실미도에 가기 전엔 대전지역에서 행상을 하고 살았던 모양이다.
가족들은 1968년 봄에 대전지역에서 행상하다 집에 잠시 들른 오빠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어머니가 막내를 낳은 해였다. 오빠가 어느 날 집에 와서 물을 길어다 놓고 어머니가 누워계신 안방에 불을 땠다. 그리고 바로 밑 여동생인 큰언니에게 옷을 사 입으라며 돈을 주고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가족들이 임성빈 씨를 찾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임충빈)"아버지가 전국 방방곡곡 오빠를 찾으러 다녔다. 박정희 정부 시대에도 대통령 앞으로 청원과 진정서를 많이 보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박정희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답장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임성빈의 행방을) 알아본 결과 모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답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분실하고 말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통령에게 답장을 받았을 때는 오빠가 사형을 당하고(1972년 3월 10일)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부는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오빠가 실미도 대원인 걸 2004년 처음 알았다"
-부모님은 임성빈 씨가 실미도 공작원이란 사실을 아셨나.
(임충빈)"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73세 되시던 해 돌아가셨다. '어떻게 해서든 오빠를 찾아보라'고 유언을 남기셨다. 생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빠 문제로 자주 다퉜다. 어머니는 오빠를 찾아보려고 굿을 하고 점을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런데 온갖 방법을 시도해도 오빠를 찾을 수 없었다.
속앓이를 했던 탓인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일찍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머니는 해마다 봄이 되면 머리에 천을 동여매고 누워계셨다. 오빠 기일이 있는 3월이 되면 그렇게 자주 아프셨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임성빈 씨가 실미도 부대원이란 사실을 언제 알게 됐나.
(임일빈)"2003년 말에 영화 '실미도'가 개봉됐고 관심사로 떠오르지 않았나. 2004년 초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 실미도 부대의 실제 기간병 4~5명이 출연했다. 그 방송을 본 친척 분께서 '실미도 부대 토크쇼 프로그램을 봤는데 아무래도 네 오빠가 연관된 거 같다'며 연락이 왔다.
우리 가족은 실미도 부대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영화도 보지 않았던 때였다. 그런데 그 방송 프로그램을 보니 우리 오빠가 실미도에 끌려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알음알음 실미도 부대의 생존 소대장으로 알려진 김OO 씨에게 연락을 했다. 그를 통해 오빠가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럼 2004년이 되기 전까지 집으로 임성빈 씨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나.
(임일빈)"오빠 앞으로 군대 영장이 나왔을 때 딱 한 번 사람들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있어야 군대에 가지 않겠나.
하루는 어떤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오빠가 왜 군대를 가지 않는지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 행방불명이 됐다고 답했을 뿐인데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더라. 오빠가 군대에 가지 않아도 잡으러 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들도 오빠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실미도 공작원 임성빈 씨의 허위 사망신고일이 적시된 제적등본. 제적등본엔 임성빈 씨가 1969년 11월2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임씨의 사형은 1972년 3월10일 집행됐다. 제적등본에 찍힌 도장도 임씨의 아버지 것이 아니라고 유족은 밝혔다. 유족은 당시 정부가 허위로 사망 신고했다고 주장한다. [문재원 기자]
임일빈 씨는 군대 이야기를 하던 도중 오빠 임성빈 씨의 사망일이 적시된 제적등본을 꺼냈다. 제적등본엔 임성빈 씨의 부친이 1969년 11월 20일 사망신고를 한 것으로 돼 있다. 유족들은 2004년 제적등본을 떼어 보고 나서야 임성빈 씨가 법적으로 사망신고가 돼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사망신고는 누가 한 것인가.
(임충빈)"정부에서 허위로 신고한 것 아니겠는가. 2004년 오빠의 제적등본을 떼어 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아버지께서 전국을 떠돌면서 사라진 오빠를 찾아 헤매던 그 때, 엉뚱하게도 본인이 직접 아들의 사망신고를 한 것으로 돼 있었다. 사망신고 일자는 1969년 11월 20일. 신고자는 아버지 이름인데 제적등본에 찍힌 도장은 아버지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들 몰래 국가에서 허위로 사망신고를 한 것이다. 이 사실도 2004년에 알게 됐다. 이렇게 원통하고 분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임성빈 씨가 실미도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했나.
(임충빈)"그 이후엔 실미도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찾아갔다. 국방부·보훈처·권익위 등 관련이 돼 있는 모든 곳에 진상을 규명하라고 요구했다. 유해 인도 소송을 내기도 했다. 그런 요구를 16년 전에 시작했는데 당시엔 가족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모였다. 지금은 가족 중에서 건강이 좋지 않아 이동이 불편한 분도 있고 막내 남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가 실미도 사건을 조사했을 때 공작원 유해 발굴 작업에 나서지 않았나. 그런데 임성빈 씨를 포함해 사형당한 4명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당시 유해를 찾기 위해 어떤 곳을 조사했던 것인가.
(임일빈)"벽제 지역과 오류동 지역이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 서울 시립묘지 지역에선 발굴 작업을 두 번 했다. 그래서 20명 공작원 유해를 찾았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 지역에선 발굴 작업을 한 번 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사형집행과 관련된 증언을 한 사람들 중에 오류동 지역을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던데 결국엔 찾지 못했다."
"오빠 유해 찾아 국립묘지에 모시고 싶다"
▲사형 당한 실미도 공작원 4명의 유해 암매장지 제보자를 찾는 국방부의 언론 광고. [문재원 기자]
국방부 과거사위의 조사결과는 2006년 7월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보고서'로 묶였다. 이 보고서엔 오류동 사형수 매장지에 대한 조사과정에 대해 "오류동 지역은 당시 사형집행 및 매장에 동원된 군 관련자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보안각서를 이유로 진술 및 증언을 거부하거나 번복하는 등 소극적이며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과적으로 발굴은 이뤄질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은 수사가 아닌 조사로서의 한계로 판단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형수 4명 유해 발굴 작업의 미흡함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유족들도 국방부 과거사위가 암매장된 4명의 시신 찾는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보나.
(임충빈)"그렇다. 당시엔 사형집행 과정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이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실미도 부대 관련자들이 오래 전 썼던 보안각서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사형집행과 매장에 관여한 군인, 운전수, 인부 그 누구라도 나와서 한마디라도 해줬더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여전히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죽인 자, 묻으라고 지시한 자, 묻은 자, 운전한 자 그들은 다 어디에 간 거냐. 왜 모두 숨기만 하는지 답답하다."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에 아쉬움이 컸을 듯하다. 그만큼 이번 2기 진실화해위 조사활동에 대한 기대가 클 것 같다.
(임일빈)"사실 실미도 사건이 2기 진실화해위의 조사대상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2005년 국방부에서 조사에 나섰을 때 모든 것을 해결해줬으면 했다. 당시 국방부 조사에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오빠의 유해도 찾지 못했고 군인 신분도 인정받지 못했다. 심지어 오빠는 실미도를 탈출할 때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민간인을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게 없다. 물론 실미도에 가기 전에도 평범하게 일하던 청년이었다.
이후에 수차례 '유해를 찾아 달라, 군인신분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우리가 지금 바라는 것은 두 가지다. 오빠의 유해를 찾는 것, 그리고 명예회복이 돼서 그 유해를 국립묘지에 모시는 것이다."
▲ 정근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이 27일 서울시 중구 남산스퀘어에 위치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진상규명 활동 조사개시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27일 본격적으로 조사활동을 개시한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오전 11시30분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사개시 결정을 발표했다.
이날 조사개시가 결정된 사건은 모두 328건(신청인 수 1330명)이다. 주요 사건으로는 실미도 사건을 포함해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전남 화순지역 군경 및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서산개척단 인권침해 사건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인권침해 사건 등이 있다.
2기 진실화해위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의 개정시행으로 지난해 12월 10일 출범했다. 과거 강제수용, 민간인 학살, 의문사, 알려지지 않은 인권침해 사건 등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출범 직후부터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진실규명 요구사건은 5월 21일 기준 총 3636건(신청인 수 7443명)건에 이른다.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범위는 △항일 독립운동 △해외동포사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인권침해·조작 의혹 사건 △적대세력 관련 사건 △그밖에 역사적 중요 사건으로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 등이다.
진실화해위는 신청이 접수된 사건에 대해 순차적으로 검토해 조사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접수된 사건에 대한 시행령상 조사개시 기일(신청 접수일로부터 90일 이내)를 맞춰나가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