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미 "밥그릇보다 중요한 것 있다…언론은 그 가치를 붙잡아야"

양동훈 / 2020-01-22 16:13:33
제1회 이용마 기자상 특별상 황윤미 씨
동아투위 참여 당시 새내기 아나운서로
기지 발휘해 외부로 언론탄압 상황 알려
지금은 시댁 영주에서 전통식품 사업
"진짜 더 많이 고생한 선배들이 많고, 저는 한 일도 없는데 상을 준다고 하니 당혹스럽고 민망하네요."

방송기자연합회와 방송문화진흥회가 지난해 제정한 '이용마 언론상' 특별상을 받은 황윤미 씨. 동아방송 아나운서로 입사해 1975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에 참여했을 당시 24살 막내 아나운서였으니 올해 69세다.

이용마 언론상은 언론자유와 공정 언론을 위해 애쓰다 2019년 8월 세상을 떠난 고 이용마 MBC 기자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본상 수상자는 재미언론인 안치용 씨다. 

황 씨는 동아투위 당시 건물 전화선이 모두 끊어진 상황에서 강제진압 사실을 외부에 알린 공로로 이번 상을 받게 됐다. 유일하게 살아있던 기상청 핫라인을 통해 CBS 방송국과 연락해 진압시도 사실을 알렸고, 이 사실이 전 세계 언론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야간 통행금지시간에 자행한 언론탄압 시도를 알림으로써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기여한 점을 평가받은 것이다.

안형준 방송기자연합회장은 "동아투위 사건은 일반적으로 신문기자들만의 자유언론 투쟁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해직언론인 중 30여 명이 PD나 아나운서였다. 다른 여러 직종의 언론인도 동아투위에 함께 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의미 있다고 심사위원들이 판단했다"고 수상 이유를 설명했다.

황 씨는 ‹UPI뉴스›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더 주도적인 일을 한 선배 연락처를 알려줄 테니 그분을 인터뷰하면 어떻겠냐"며 고사하다가 어렵게 응했다. 70을 앞둔 나이에도 강단 있는 원로 언론인의 육성이 배어 나왔다. 

▲ 제1회 이용마 언론상 특별상 수상자 황윤미 씨 [황윤미 씨 제공]

이번에 이용마 언론상을 받게 된 것이 동아투위 사건 때문으로 알고 있다.

"1973년 가을에 입사해 사건 당시에는 완전히 막내 아나운서였다. 유신독재 시대였기 때문에 굉장히 엄혹했다. 진짜 혹독했다. 말 한번 잘못하면 행방불명 되는 수가 있었다. 제일 가벼운 게 옥살이 정도였다. 그래서 동아일보사 건물(현 일민미술관)에 모여 정부의 광고탄압에 항의하는 농성을 했다. 낮에는 재야인사들과 후원자들이 지켜주셨는데, 밤에는 통행금지 때문에 건물 셔터를 내려놓고 버텼다. 그러던 와중 깡패들이 곧 습격한다는 이야기가 (사내에) 돌았다. 새벽 2~3시쯤 되자 셔터를 뜯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선배들은 매 맞고 여자 선배들은 머리채 잡힌 채 끌려나가는 소리 들리고 굉장히 시끄러웠다."

그때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신 건가.

"(당국이) 전화선을 전부 끊어놨더라.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막내 아나운서였기 때문에 관상대(현 기상청)와 (사이가) 가까웠다. 뉴스 할 때마다 '현재 기온 몇 도입니다, 내일 예상 기온은 몇 도입니다' 알려야 하니까. 외부로 끌려나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관상대에 핫라인으로 연락을 넣었다. 당시에 CBS가 아침뉴스를 제일 먼저 했다. 관상대에서도 (내가 일하는) 동아방송에서 온 연락인 줄 아니까 자세한 상황 얘기하지 않고 그냥 빨리 CBS 연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송수화기를 거꾸로 맞대 달라고 했다. 그러면 감이 좀 멀긴 하지만 서로 목소리가 들릴 것 아닌가. CBS에 '저희가 농성하고 있는데 폭도들이 들어왔다. 남자들이 무차별 구타당하고 여자들도 끌려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나.

"CBS 새벽 첫 뉴스로 이게 나갔다. 다행히도 뉴욕타임스 기자가 이 뉴스를 보고 전 세계에 알렸다. 그때 당시 우리나라 언론에 보도된 건 CBS가 유일했다. 유신독재 시기니까 전 세계 언론들이 우리나라 정세를 주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역사가 깊은 동아일보사가 깡패들에 의해 습격당했다는 사실이 전 세계로 알려지니까 그 후론 우리를 손대지 못하게 됐다."

결국 많은 언론인들이 해직됐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군사정권 시기에 계속 자유언론을 부르짖었다. 처음에는 동아일보 사주도 우리가 쓰는 기사대로 가만뒀는데 정부 탄압이 들어오면서 광고가 일절 끊겨버렸다. 백지광고 사태라고, 우리 세대에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독자들이 10만~20만 원씩 내서 자기가 지면을 사서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실었다. 정치풍자 얘기 써주기도 하고 우리한테 힘내라는 얘기도 보내주시고, 그렇게 독자들이 광고지면을 채워줬다. 하지만 (그런 소액광고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사주도 결국 정부에 굴복하게 됐다. 회사 측은 우리가 동아일보사 건물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광화문 지하도 앞에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 출근하는 (옛) 동료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 1년 끌고 정식으로 해직이 됐다."

해직되고 어려움은 없었나.

"그 당시에 동아일보가 월급을 가장 많이 줬다. 다른 언론기관에 비해 확실하게 많이 줬고, 1년 투쟁하는 동안 후원금들이 참 많이 들어왔다. 완전히 해직될 때까지는 적어도 저는 경제적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해직된 이후에는 그래도 저는 미혼이라 버틸 만했는데 결혼한 선배들은 생활고에 참 많이 시달렸다. 어디도 취직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많이들 고생했고 출판계로 간 선배들이 많았다. 지금도 그래서 출판사 하는 선배들이 많다. 선배들이 한길사 같은 출판사들 세워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는 계기도 됐다. 전두환 정권 들어서고 한참 후에 우리에 대한 탄압이 조금 풀렸다. 나 같은 경우는 프리랜서로 KBS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론 언론계와 인연이 없었나.

"해직된 동아투위, 조선투위 선배들이 1988년 봄에 한겨레를 창간했다. 창간은 했지만 광고의 벽이 굉장히 높았다. 당시만 해도 기업들이 정부 눈치 보느라 '여기 광고 줘도 되나'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기업 홍보팀 찾아가서 '한겨레에서 왔습니다' 하면 바쁘다고 안 만나주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1988년이었으니까 당시 내가 30대였다. 동아투위 출신이라 농성 투쟁하고 어두운 이미지 가진 중년의 남자 선배들이랑은 좀 다를 것 같았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내가 광고를 맡겠다고 했다. 설마 나는 회사들이 쫓아내진 않을 것 아니냐 하고. 그래서 일간지 사상 최초로 여성 광고부장이 됐다. 아나운서 출신이라 사람 만나서 설득하는 기술도 좀 있고, 당시 한겨레에 광고 담당할 만한 사람도 없어서 하게 된 거다."

▲ 황윤미 씨는 경북 영주에서 전통식품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황윤미 씨 제공]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한겨레에 94년 정도까지 다니다가 시댁이 있는 경북 영주로 내려오게 되면서 전통식품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지금은 '무량수'라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된장, 고추장, 간장, 전통 밑반찬 같은 것을 팔고, 온라인 쇼핑몰도 운영 중이다."

요즘 언론계에 대한 생각은.

"영주로 내려오면서 신문과 방송을 거의 보지 않았다. 시부모님 모시고 맨 처음에는 과수원 농사를 지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컸기 때문에 농사짓는 게 너무 힘들었다. 자꾸 언론 쪽 보게 되면 도로 뛰쳐 올라가게 될 것 같아서 아직도 안 보고 있다. 그나마 한겨레21 같은 주간지나 월간지 조금 보고, TV도 가끔 지나간 것을 보기는 한다. 그래서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조심스럽게 얘기해보자면, 너무 신변잡기 위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조금 든다. 물론 각자의 뜻이 있는 거니까 누가 옳다 그르다고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언론이 너무 무거워서도 안 되겠지만, 어렵고 무거운 것을 (지금은) 너무 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는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용마 언론상 특별상을 받게 된 소감은.

"진짜 상을 준다 그랬을 때 너무 당혹스러웠다. 45년 전의 일이고, 별로 한 일도 없는 내가 상을 받게 돼서 선배들 보기 너무 민망했다. 내가 무슨 자유언론을 부르짖은 대단한 공로가 있는 게 아니고, 기지를 발휘해서 외부 세계에 뉴스를 알린 공로를 인정받은 것뿐이다. 큰 불상사가 있을 뻔한 일을 막았다고 상을 받게 된 거다. 그래도 후배들이 오래전에 고생한 선배들의 일을 아직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는 것에 너무 감사드린다. 이번에 수상소감 인사할 때 이용마 기자와 그 동료들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땅의 언론에 아직 희망이 남아있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언론인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경제 논리가 어쩔 수 없는 측면은 있는 것 같다. 무조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시골에 내려와 보니 더 크게 느낀다. 시골 와 보면 박정희 신화가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을 정도다. 다만 이 말이 정확히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밥그릇보다 중요한 것이 꼭 있다는 것을 항상 믿는다. 정말로 믿는다. (언론인으로 일하면) 경제적으로 조금 손해 볼 수도 있지만 일하는 것이 즐겁고 떳떳하니까. 내가 70이 다 돼서 상을 받게 되지 않았나. 그러니까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참 명예롭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 제1회 이용마 언론상 시상식은 오는 31일 오후 5시, 한국방송회관 3층에서 열린다.)

KPI뉴스 / 양동훈 인턴 기자 ydh@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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