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생에서 만나는 빛나는 순간은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 문학전문기자 / 2019-12-19 15:00:32
10년 만에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 펴낸 소설가 권지예
일상을 무대에 올려놓고 깊이 들여다보는 여행소설
죽음과 욕망 탐구에서 걸어나와 보다 넉넉해진 시선
"오래 된 부부는 '따로 또 같이' 사는 공동운명체"

'그 도시의 얼굴은 야누스의 얼굴이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순수와 오염, 자유와 고독, 혼돈과 모순, 환상과 환멸, 매혹과 잔혹. 그 시간을 통과해낸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베로니카의 눈물을, 그 눈물의 의미를 떠올리기 싫은 마음도 있었는지 모른다.'

 

소설가 권지예(59)가 쿠바에 다녀온 뒤 그곳을 배경으로 지은 중편 '베로니카의 눈물' 한 대목이다. 그녀는 아바나에서 돌아온 지 2년이 다 되는 시점에서도 왠지 그 도시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도 쓰지 못했노라고 고백하면서 쿠바와 쿠바 사람에 대한 정돈되지 못한 혼란스러움을 그 이유로 들었다. 눈물인가 하면 그 이면에 감추어진 계산이 보이는 듯하고, 그렇게만 보자니 가난하지만 따스한 마음을 뭉개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녀가 이 작품을 표제로 삼아 10년 만에 다섯 번째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은행나무)을 펴냈다. 중간에 신문에 연재한 장편을 펴내긴 했지만 꽤 공백기가 길었다.

 

▲10년 만에 소설집을 펴낸 소설가 권지예를 광화문에서 만났다. 그는 "말이 10년이지, 현재 우리 사회에서 10년 세월의 변화는 한 세기만큼 긴 시간 같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여행에세이나 안내서에는 쿠바가 댄스와 음악, 열정의 나라라고 소개돼 있지만 막상 현지에 들어가 아파트를 얻어서 살다보니 너무 다른 거예요. 쿠바는 리얼리즘에 담아야겠더라구요. 돈만 있으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잘못 왔구나 싶었어요.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요. 어느 날은 휴지만 잔뜩 쌓여 있고, 어느 날은 비어 있고, 쌀을 사야 하는데 구하질 못해요. 현지인들은 배급을 받아서 걱정이 없는데 나는 호텔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여행자도 아니고 그곳 주민도 아닌, 제3의 틈입자여서 나중에는 영양실조까지 오는 느낌이더라구요."

 

권지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서 2016년 10월부터 3개월 동안 쿠바에 다녀왔다. 아바나에서 아파트를 빌려 살았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프랑스에서 8년 가까이 유학생활까지 했고,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 구사하는 그녀가 쿠바 생활을 너무 쉽게 생각한 셈이다. 베로니카라는 70대 여인이 그녀의 아파트에 드나들며 도움을 주는데 이 여인은 수고했다고 돈을 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베로니카는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자신을 '쿠바의 엄마'로 여기라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그 눈물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작지 않은 금액의 돈이 없어져 내내 불편해하다가 귀국한 지 한참 뒤에서야 책갈피에서 그 돈을 발견하고 '습자지에 먹물 번지듯 가슴이 조금씩 저려오는' 체험을 한다.

 

이번 소설집에는 쿠바 관련 단편이 하나 더 있다.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이 그것인데 이 소설에도 스쳐가는 관광객은 포착하기 쉽지 않은 쿠바인의 곤고한 삶이 있다. 수현의 남편 민수는 운동권 출신으로, 쿠바에 갔다가 소피아 곤살레스라는 어린 여자를 만났다. 민수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밀봉한 꾸러미를 자신이 죽거든 곤살레스에게 전해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수현이 그 물건을 들고 쿠바에 가서 여자를 찾는 줄거리인데, 민수가 곤살레스라는 어린 창녀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죽어가면서도 잊지 않았던 생의 빛나는 순간에 대한 서사가 담겨 있다.

 

▲쿠바 말레콘 해변에 선 권지예. 관광객도 아니고 현지 주민도 아닌 제3의 틈입자로 3개월 간 쿠바에서 생활한 그는 겉으로 보이는 낭만이나 열정과는 다른, 쿠바의 혼란스러운 삶을 체험했다. [권지예 제공] 

 

'우리가 처음 만났던 저녁의 말레콘 해변. 너는 내가 본 어떤 여자보다도 여리고 깨지기 쉽고 아름답고 위험한 어린 창녀였지. …카리브해 물빛을 닮은 아쿠아마린 묵주 팔찌. 60년이 넘은 물건이었지만 그 소중한 것이 오후의 햇빛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던지! …하늘과 바다와 푸른 보석이 같은 색으로 빛났어. 맑고 뜨거운 햇살이 꿀처럼 너의 목덜미와 팔뚝을 흐르고 상쾌한 바람 한 줄기가 머리칼을 날리는 그런 순간이면, 온 세상이 반짝여서 참 좋았어. 너는 그 순간을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순간이라 했지. 할머니가 가르쳐주었다며.'

 

꾸러미 속에는 곤살레스가 잃어버린 것과 같은 아쿠아마린 묵주 팔찌가 들어 있었다. 민수가 죽어가면서, 혁명을 통해 희망을 꿈꾸었던 나라의 어린 창녀에 '파라다이스 빔'을 선물한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 묶인 작품들에서는 권지예가 이전에 탐구했던 죽음과 사랑, 욕망에 대한 서사에서 한걸음 더 걸어나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보인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생에서 만나는 빛나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방황하는 딸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것도 이처럼 찬란한 생의 고갱이를 맛보지 못할까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마음 때문일 터이다. 이 단편은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를 여행하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현주의 딸 서연은 방송국 예능작가로, '왕년의 아이돌 스타에 지금은 입담으로 TV 예능에서 잘나가는 L'에게 성폭력을 당해 임신한 상태로 여행길에 올랐다. L에게 당한 다른 여성과 함께 미투 고발을 앞두고 방황하는 중이다. 그런 딸의 사연을 알고 엄마 현주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속을 끓인다.

 

'그게 무엇이든 가능하면 빨리 끝내라고 하고 싶다. 오래 거기 함몰되지 말고 네 인생을 찾아가. 계속하면 산티아고 노인처럼 다 잃고 말거야! 목숨 바쳐 싸워봤자 네 손엔 청새치 뼈만 남을 거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넌 노인이 아니야! 넌 젊어. 구질구질하고 하찮은 가치에 목숨을 걸 필요 없어.'

 

엄마 세대의 솔직한 생각이 그대로 투영된 대목이다. 싸워본들 뼈만 남은 청새치를 거둘 뿐이라는 생각은 다분히 패배적이다. 그렇지만 악머구리 끓는 인터넷 세상을 생각하면 어느 엄마인들 쉽게 자식을 그 용광로에 던질 수 있을까. 사실 강남 부자들의 집에서 도우미로 살고 있는 엄마인 현주 또한 순결을 잃고 임신했다고,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스물넷에 확신 없는 결혼을 했던 처지다.

 

▲오랜 결혼 생활 끝에 권지예가 터득한 부부의 공존 스타일은 '따로 또 같이'이다. 그는 "거리감이 깨질 때, 더 가까워질수록 문제가 생긴다"고 소설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그게 반드시 옳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다른 인생을 살아온 엄마 세대가 제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일 겁니다. 그 상황에 함몰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정리하고 빨리 일어서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건데, 사실 가해자를 어떻게 해버리고 나만 온전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실 몇 년 사이에 성인지 감수성이 많이 달라져서 이렇게 말하는 게 겁나기도 하지만, 소설 속 인생도 작가가 집필하던 당대의 현실이니 그 부분을 독자들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은 발칸반도 10개국으로 부부가 함께 떠난 여행 이야기다. 실제로 2015년 권지예 부부가 다녀온 여행을 배경으로 집필한 소설로, 그녀 세대의 결혼과 부부에 대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로 또 같이'. 이것이 소설 속 부부의 공존 스타일이다. '돈독하게 우정을 나누는 오랜 친구처럼, 신뢰를 쌓은 사업 동반자처럼, 애증과 연민이 공존하는 모자(母子)처럼 그들의 삶은 공동운명체로서 그럭저럭 굴러가는 듯했고, 그 거리감이 깨질 때, 오히려 더 가까워질수록 문제가 생긴다'고 썼다.

 

"사실 제 나이 또래 여자들이 할 말은 굉장히 많아요. 싸우려고 했으면 이혼했겠지만 어찌됐든 포용하려고 노력해서 이만큼 오고 나니 지금은 평안해진 거 같거든요. 남자 여자 전쟁하면 뭐하겠어요? 보면 이 갈리고, 없으면 그리운, 그립다기보다 연민이겠지만, 애틋해요. 애틋해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거죠. 달콤한 말은 서로 하지 않아도 '따로 또 같이' 가는 것도 좋아요."

 

권지예는 2009년부터 2년 동안 일간지에 진한 성애소설 '유혹'을 집필하기도 했다. 5권짜리 단행본으로 펴냈는데, 그녀는 "순수문학에서는 느끼지 못한 내 멋대로 쓰는 시원한 맛이 있었다"면서 "왜 성애소설은 남자 입장에서만 여자를 상품화해서 써야만 하는지, 여자 입장에서도 쓸 수 있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파리를 배경으로 삼은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까지 이번 소설집은 여행소설이 중심인데, 마지막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는 유일하게 서초동 세 모녀를 살해한 엘리트 가장 이야기를 담은 이곳의 이야기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배경을 픽션으로 상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단편이다.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문학판으로 돌아온 그녀는 "인생이라는 것을 넓게 확장시켜 사회적 문제와 함께 인간의 삶을 망원렌즈를 비롯한 다양한 렌즈로 들여다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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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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