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근대사 회고〉 등 전집 9권 중 1차분 3종 발간
'그리피스와 〈은자의 나라 조선〉', '헐버트와 대한제국'이라면 요즘 젊은이들은 구한말과 역사 교과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 책에는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宇, 1859 -1916), 언더우드2세(Horace H. Underwood, 元漢慶, 1890~1951),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說羅,1858~1902), 모펫(Samuel A. Moffet, 馬布三悅, 1864~1939), 밀러(Edward H. Miller, 密義斗, 1873~1966)와 부인(Mattie H. Miller), 스크랜톤(W. B. Scranton, 施蘭敦, 1885~1922), 쿤스(Edwin. W. Koons, 君芮彬), 게일(James. S. Gale, 奇一), 매쿤(George S. McCune, 尹山溫) 등 구한말과 개화기에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이 등장한다.
또한 순칠 이준(1859~1907), 보재 이상설(1870~1917), 송재 서재필(1864~1951), 좌옹 윤치호(1865~1945), 우남 이승만(1875~1965), 백범 김구(1876~1949), 도산 안창호(1878~1938), 응칠 안중근(1879~1910), 우사 김규식(1881~1950), 해온 백남훈(1885~1967), 육당 최남선(1890~1957), 인촌 김성수(1891~1955), 춘원 이광수(1892~1950), 위당 정인보(1893~1950) 등 위인전이나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두 세기에 걸쳐 백 다섯 해를 산 영미법철학자 최태영(崔泰永, 1900~2005)이 쓴 최태영전집의 1권인 〈나의 근대사 회고〉라는 책 이야기다. 최태영은 일본 메이지대학 영법학과에서 영미법철학을 전공하고 한국 최초의 법학 정교수가 되어 1924년부터 보성전문, 부산대, 서울법대, 경희대, 중앙대, 청주대, 숙명여대 등에서 수많은 학생을 가르쳤다. 또한 자신의 모교인 경신학교의 2차 설립자로서 학교장과 서울대 법대학장을 지냈다.
그는 대한민국 법전편찬위원, 고시전형위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여러 권의 법학, 역사 관련 책을 냈다. 유가증권 세계통일법(1930년대, 평양), 현행 어음·수표법(1953, 민중서관), 상법총칙 및 상법행위(1957, 민중서관), 한국 상고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1979, 학술원), 중국 고대 법사상의 역사적 배경(1981, 학술원), 한국상고사(1990, 유풍),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2002, 눈빛) 등이다. 평생 학자로만 전념해온 일생을 통해 이룩한 연구와 저술에서 보듯, 그는 법학에서 시작해 한국 고대사 연구가로 학문 세계를 넓혀 왔다.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는 신념이 선생의 역사연구 근본이념이다.
그의 일생 105년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맞닿아 있다. 이 책에는 1세기에 걸쳐 근대의 경제 생활사와 일상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회고와 증언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교과서의 인물들을 지켜본 동시대인만이 찍고 쓸 수 있는 사진과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업어 키운 쿤스 선교사, 자신만 아는 비밀을 간직할 만큼 세교(世交)를 맺은 게일∙매쿤∙언더우드2세 선교사 등등.
최태영은 대한제국 4년인 1900년 봄 황해도 구월산 북쪽의 은율군 장련(長連)에서 아버지 최상륜(1882~1973)과 어머니 김영순(1879~1961)의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황해도 서북단 해안에 터잡은 장련은 기독교를 통해 일찌감치 개화한 포구도시로 단군 유적의 보고인 구월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구월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한천을 이뤄 토지가 비옥하며 오곡이 풍성해 쌀과 콩, 목화와 과일 등 황해도 일대의 농산물이 집산하던 곳이자, 근대화의 상징인 진남포 뱃길로 일찍부터 신문명을 받아들인 600호 남짓한 윤택한 고을이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태어난 해에 처음으로 서울 종로에 전등이 켜지고 우리나라가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고 신식 병대와 군악대가 설치되었다. 한강철교와 경인철도도 개통되었다. 청일전쟁과 개화당의 갑신정변, 독립협회운동이 일어난 뒤이며 신식교육이 막 시작된 때였다.
그의 어릴 적 기억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러일전쟁(1904)과 을사조약(1905) 즈음부터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쇠기름을 버터라며 퍼먹던 러시아 군인들의 잔상이 남아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조부는 어느 날부터 술과 연초(담배)를 다 끊고 개신교로 개종했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외세의 두 전쟁(청∙일, 러∙일)을 계기로 장련의 천석꾼이었던 조부 최계준이 신문명과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조그만 섬나라 일본이 대국(청나라와 러시아)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신문명을 받아들인 것임을 깨닫고 그 수단으로 개신교를 택한 것이다.
그의 부친은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서울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다가 조부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와서 가업을 잇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안악의 안명근 사건 때 일제에 붙들려 감옥에서 몇 달 고초를 겪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임정의 재정 담당자인 이준원과 함께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하다가 평양감옥에서 1년반 옥살이를 했다.
그때 그는 결혼해 처 김겸량(1901~1975)과 함께 도쿄 유학중인 신혼 부부였지만 옥살이하는 아버지를 두고 편히 잘 수가 없어 요를 깔지 않고 잤다. 광복 후에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표창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의 부친은 "상 타려고 한 일이 아니다"며 한사코 마다했다. 그 또한 후손에게 준다는 독립유공자 표창을 거절했다.
구월산 자락 장련에서의 어릴 적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장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마주쳤던 '실아(失牙)손이'(이빨 빠진 늙은 범, 스라소니) 이야기가 그것이다. 사전에서 '시라소니'는 고양잇과 동물인 '스라소니'의 잘못이거나 같은 뜻의 북한말이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적어도 황해도 장련에서 '실아손이'는 늙은 호랑이를 지칭했다.
그에 따르면 "개도 못잡아가고 기껏해야 닭이나 잡아먹고 어쩌다 발톱으로 할퀴는데 변소 갔다가 실아손이한테 엉덩이 상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그는 서울에서 경신중학을 다니던 15살 무렵 밤에 장련 집에서 피앗골 산막에 가는 길에 "등잔 켠 것 같이 눈이 번쩍번쩍하는 실아손이"를 마주친 적이 있다. '실아손이'가 사실이면 바로 잡을 일이다.
구월산에는 호랑이가 많았기에 포수들도 많았다. 호랑이 포수들은 병인∙신미양요 때 프랑스∙미국 군함을 물리친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마을의 교장 선생은 시국강연에서 총을 멘 호랑이포수 차림을 하고 "산 넘어오는 큰 사자 러시아와 바다 건너오는 표독한 호랑이 일본을 총을 들고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뛰놀던 장련의 피앗골 산막 주변에는 호랑이 포수 출신 홍범도 장군의 어머니 묘가 있었다. 평안도에서 난을 일으킨 홍경래도 한때 장련에서 살았고, 백범 김구 선생도 한때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으니 가히 혁명가의 요람이라고 할 만했다.
학교에선 군대식 병식(兵食)체조를 했다. "구한말 구식군대가 해산하니 13도에 군인이 좍 퍼져서 이들의 지도로 각급 학교마다 병식체조가 퍼진" 탓이다. 병식체조를 할 때면 "아세아 동편에 돌출한 반도, 13도 각 군 합이 334, 면적이 3천리, 인구 2천만, 당당한 대제국이 분명하도다"라는 '학도가'를 불렀다. 그는 대한제국 최후의 행정구역이 13도 334군이었음을 이 노랫말로 기억한다. 하지만 을사조약 이후 어느 날부터인가 일본이 병식체조와 악대를 금지시켰다.
최태영은 1905년 장련의 만석꾼이던 오인형 진사가 "신문명하는 사람을 하나 데려와" 시작한 광진학교에 입학해 1910년 일제강점에 따른 교육령으로 폐교될 때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다. 바로 그 신문명하는 사람이 일본군의 민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복수로 1896년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죽인 후 김창수라는 본명 대신에 거북 龜(구)자를 쓴 '김구 선생'이었다(상해 임정에 들어간 뒤로 아홉 九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밤에 광진학교 광장에 온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환등기로 세계 각국의 도회 사진과 비스마르크, 워싱턴 같은 영웅들을 보여주면서 개명한 이치를 계몽했다. 개화당의 서재필∙홍영식∙박영효 등도 이때 알게 되었다. 김구 선생은 그때 모친 곽낙원 여사와 오 진사네 사직골 전답을 관리하며 살았다. 어린 내가 그 골짜기에서 가재를 잡으며 놀 때 할머니가 밤을 삶아주시며 귀애하시던 기억이 있다."(58쪽)
이 책에는 이처럼 김구 선생에 대한 추억과 함께 1906년 여름 광진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찍은 빛 바랜 사진이 한장 실려 있다. 장가들어 갓 쓴 학생과 담뱃대 문 학생, 머리 딴 학생과 머리 깎은 학생 등 신교육이 시작된 대한제국 시대상이 반영된 이 사진은 김구 선생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사진으로 나중에 김구 선생 10주기 기념식에 최태영이 들고 가 공개 발표한 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대한제국 멸망사〉를 쓴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에 대한 회고도 눈에 띈다. 고종이 조선에 신교육을 위한 육영공원을 설치하고 뉴욕에서 데려온 3인의 영어교사 중 1인인 헐버트는 이상설∙이준∙이위종 3인의 헤이그 밀사와 행동을 함께 하며 조선 독립을 지원하고 한국문화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문필가로도 활약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통한 헐버트는 서재필∙주시경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면서 한글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글을 사랑한 헐버트와 한자를 애호한 게일(Gale) 선교사가 맞붙어 토론을 벌인 비화도 소개돼 있다. 캐나다 사람으로 평민들보다는 지식인과 잘 어울린 게일은 1889년 황해도 송천(소래)에서 한학자 이창직을 만나 한문과 한글 풍습을 배웠다. 한문 옹호론자인 게일은 왕립아시아학회에서 한글이냐, 한문이냐의 문제를 두고 헐버트와 대토론을 벌여, 언더우드1세가 '천주'라고 주장한 데 반해 '하나님'으로 부르자고 해 합의를 끌어낸 일화가 있다.
헐버트는 또한 언더우드 목사 등을 대신해 목회를 이끌면서 상동교회 목사로 전덕기와 인연을 맺고 1907년 신민회 비밀결사를 만들어 상동교회는 신교육과 애국운동의 본산이 되었다. 전덕기 목사의 안내로 이준 열사가 헤이그로 떠나기 전에 헐버트와 전략을 의논한 곳도 상동교회와 손탁호텔이었다.
앞에서 최태영 집안이 본디 천주교도였으나 개신교로 개종했다고 했다. 성당에 다닐 때 부친은 세례명이 베드로였고, 최태영은 요셉이었다. 장련에도 개신교 전에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는데 인근 안악 매화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 진사네 집에 처음 들어와 독일인 오 신부와 홍석구 신부가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했다. 홍 신부는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당하던 날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조선말을 잘한 두 신부는 최태영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고, 그의 부친은 최태영이 엄마 젖을 뗀 뒤 안악성당에 가서 깡통에 든 양젖을 가져다 먹이곤 했다. 어려선 성당에도 자주 놀러갔기에 독일인 오 신부는 "요셉아, 열교(裂敎; 개신교)에 가지 말고 성당에 다녀야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개신교로 옮기자 오 신부가 자신을 미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런 인연과 기억이 있었기에 후일 황해도 천주교사(史)를 쓸 때 두 신부를 한 사람으로 오인해 오 신부인지 홍 신부인지를 헷갈려 최태영에게 증언을 요청했을 때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토대로 분명하게 해주었다.
당시 황해도 개신교는 재령의 미국 장로교 선교사 헌트(W. B. Hunt)와 쿤스(E. W. Koons)가 순회 지도했다. 강연 때면 수백 명의 손님을 치른 그의 집안이 특히 쿤스 선교사와 친해 최태영은 쿤스의 권유로 서울 경신학교를 유학을 하고, 나중에는 경신학교 교장이 된 쿤스의 뒤를 이어 한국인 교장을 하게 된다. 최태영은 경신학교(1913~1917) 12기생이다.
우리나라 사학(私學)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학교로 배재학당·이화학당과 경신학교를 꼽는데, 교지에 있는 경신학교의 연혁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1886년 북미합중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원두우(元杜宇) 박사가 서울학교를 설치하니 이가 곧 본교의 전신(前身)임. 1901년 1월에 선교사 기일(奇一) 박사의 경영으로 서울 연동예배당 부속 가옥을 교사로 정하고 중학교라 일컬으며 신입생 6명으로 입학식을 거행함. 1905년 선교사 밀의두(密義斗) 씨가 교장으로 취임함. 1905년 현금 교지(校址)에 건평 50평의 3층 벽돌집을 신축하고 John D. Wells 씨의 기념당이라 일컬음. 동년에 제1회 졸업생 1인을 냄.
1906년 가을에 북감리파 경영인 배재학당과 합병하여 합성(合成)중학교라 일컬었다가 다시 분리하여 경신학교라 일컬음. 1908년 8월 12일 구한국 학부(學部)로부터 인가를 받음. 1910년 원두우 박사가 임시교장으로 취임함. 동년에 교사를 증축하니 총건평이 150평이 됨. 1913년 교장 밀의두 씨가 사임하고 군예빈 씨가 취임함.…(중략)…1925년 가을에 대강당(건평 150평)을 신축함. 1928년 6월 전 설립자 기일 씨는 귀국하고 원한경(元漢慶) 박사가 설립자로 취임함."
원두우는 언더우드, 기일은 게일, 밀의두는 밀러, 군예빈은 쿤스, 원한경은 언더우드2세 선교사를 지칭한다. 이들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최태영의 조부 때부터 3대에 걸쳐 세교를 유지했다. 20대에 황해도에 와 최태영 집안과 가까이 지낸 쿤스는 언더우드1세의 양자이기도 해서 원한경과 형제간처럼 친했다. 그가 업어 키운 최태영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경신학교 부교장이 되고 나서 얼마 뒤에 그가 교장으로 부임했다.
최태영은 외교관 자격을 갖춘 석사 출신인 모펫(馬布三悅)을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 능력으로나 학식으로나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최태영은 "가톨릭은 금지된 포교활동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 오직 포교에만 힘쓸 뿐이었으나 개신교는 포교와 교육을 같이 다뤘다. 개신교가 포교 초창기에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은 당시 이 땅에서 요구되는 신교육열의 일정 부분을 수용했기 때문이다"라고 그와 베어드(숭실대 창립자) 선교사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경신학교 교장직을 맡아 정동을 떠나 연못골(연지동) 시대를 연 공로자인 게일은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창립한 YMCA운동의 선구자이다. 1927년 선교 30주년 축하 및 송별식 때 최태영이 YMCA 강당에서 '한국인이 쓰는 한문이 중국인의 한문과 다르다는 것도 아는' 그를 위해 송별사를 했다. 최태영은 신교육이 시작된 당시 상황을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언더우드 1세가 처음엔 알렌네 학교(광혜원)의 선생을 하다가 종래 세운 학교가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다. 건물은 정동(후일 이화학당의 건물이 됨)에 있었다. 개화파들 자손을 다 죽이니까 그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한 자리였다. 1기 첫 학생이 김규식이었다. 어느 부모가 문앞에 두고 간 아기를 언더우드 내외가 아들로 키워 미국 보내 공부시켰다. 그다음부터는 일반 학생들을 받아들여 2기생으로 안창호가 들어왔다."(105쪽)
정신여학교도 출발은 마찬가지였다. 최태영은 이 책에서 "어느 날 고아를 데려왔는데 여아였다. 도로 내보낼 수도 없고 담장 너머로 여의사에게 보내서 '이 애 하나라도 가르치라'고 하여 정신여학교가 됐다."고 묘사했다. 1887년 6월 여의사이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엘러스(A. J. Ellers)가 여성계몽을 목적으로 정동에 있던 제중원 사택에 세운 정동여학당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근대 교육기관은 대체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고아들을 가르친 것이 효시다.
상동교회 전덕기(1875~1914) 목사도 9살에 조실부모한 고아였다. 남대문 상동시장에서 숯장사를 하던 숙부 밑에서 일하다가 스크랜턴 목사를 만나 독립협회운동에 가담했다. 스크랜턴은 선교사 활동이 대궐을 기점으로 한 정동에서 이뤄지는 데 불만을 품고 민중들이 있는 상동으로 나와 1천 평을 사서 시(施)병원을 운영하며 의료∙교육선교 활동을 해 상동교회는 최단시일에 신도 1천 명을 돌파하게 된다.
전덕기는 헐버트의 도음으로 1904년 상동청년학원을 결성해 수준높은 교육을 실시하고, 1907년에 비밀결사 신민회를 만들어 애국교육운동을 전개하고, 국민교육회(이준 회장)를 통해 '삼천리 강산 1리에 하나씩 3천개의 사립학교를 세우자'는 계몽에 나섰다. 최태영은 서울에 가 있던 부친이 전덕기 목사로부터 감화를 받고와 하던 이런 얘기를 어려서부터 들었다. 하지만 신민회의 핵심인 전덕기는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잡혀가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에 1914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최태영은 전덕기에 대해 "진실로 훌륭한 한국인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끝까지 헌신한 애국자였다"면서 아쉬워했다.
"나라가 기울어갈 때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전덕기와 김구, 이승만은 다같이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나던 해 출생한 동갑들이다. 전덕기와 이승만은 21세 때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김구는 을미사변 이후 인천 감옥에 있던 때라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탈옥해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때 전 목사와 함께 투쟁하게 되는데 이승만은 이때 미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김구와 이승만이 함께 있었을 때는 전덕기가 세상을 떠난 뒤라 3인이 힘을 합할 기회는 없었다."(110쪽)
최태영은 특히 "전덕기가 좀더 살았다면 나중에 김구와 이승만은 그렇게 싸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 동갑 중 가장 설득력 있고 영향력이 컸던 전덕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였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아쉬워했다. 최태영은 또한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김구와 이승만이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김구의 실수와 자기세력이 없던 이승만의 친일파 중용으로 무산된 것을 애통해했다.
"김구와 원한경(언더우드2세,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자문역) 두 사람의 대면은 중요한 역사적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원한경이 먼저 김구를 만나게 해달라 해서 성사된 회동이었다. 지원해주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이날 하지 고문인 원한경을 만나고도 지원을 이끌어낼 좋은 기회를 못살렸다. 김구 선생의 첫번째 실수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을 것이다. 김규식도 바보였다. 그는 원한경과 형제간이나 마찬가지면서 이날 아예 오지도 않고 기회를 날렸다. 그때 군정과 협력했어야 되는 것이었다."(367쪽)
김구와 원한경이 만난 곳은 바로 최태영의 안암동 자택이었다. 이 책은 이처럼 구한말 개화기부터 100살 넘게 산 자만이 묘사할 수 있는 '만인보'(萬人譜)이자 '만화경'(萬華鏡)이다. 또한 조선인의 신교육 초기부터 서울의 중등교육, 조선에 아직 대학교육이 없을 때 일본 유학으로 겪은 법과대학 과정과 유학생 사회가 촘촘하게 기록돼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경신학교에 입학한 1913년 당시 서울 인구는 13만 명이었다. 골목길마다 소설책을 빌려주는 셋집이 있어 1권에 1전씩을 내고 춘향전, 숙향전, 콩쥐팥쥐, 박초시전, 김진사전 등과 서양소설들을 빌려봤다.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 책들은 일제가 금지했지만 밤에 몰래 기숙사로 팔러 오는 것을 사보곤 했다. 기숙사(경신학교)는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학생들은 밤에 방에 불을 켜놓고 담을 넘어가 종로2가 우미관에서 영화를 봤다. 졸업 때는 1인당 50전을 내고 한국 최초의 요릿집 명월관에서 사은회를 했다.
지금 한양도성 성곽길이 복원되었지만 그때도 사람들이 서울 성곽을 따라 산을 오르내리며 사대문 둘레길 40리를 하루에 다 도는 '성돌이'를 많이 했다. 영등포로 일본 군인들 훈련 광경을 보러 기타를 타고 갔으며, 수학여행은 인천이나 평양으로 갔다. 창덕궁-종묘는 돌보지 않아 모기 소굴이었다. 서울에는 빈대가 많아 밤이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진 빈대가 사람 몸에 주사기처럼 침을 꽂고 피를 빨아 앵두알처럼 빨개지면 떨어졌다. 개학해 서울 오면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죽어 새끼줄로 금줄을 쳐 놓은 집들이 많았다.
종로3가까지 이층 기와집 상점이 즐비해 포목전이 많고 광목-비단 등을 팔았다. 종로4가부터는 초가집이고 전찻길이 바로 인가 앞을 지나쳤다. 동대문 밖은 미나리 밭이었다. 신식문물이 많이 보급돼 중절모와 맥고모자를 많이 찾았다. 한 쌈에 20개씩 들어 있는 세창양행의 독일제 바늘이 인기상품이었다. 손목시계가 나오기 전이어서 지남철 위에 쇠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해시계를 많이 가지고 다녔다. 스위스제 치마(CHIMAH)표 회중시계는 고급품으로 쌀 한 섬 값인 5원이었다. 성냥이 없으니 쇠 하나와 차돌 하나씩을 가지고 다니며 말린 쑥으로 불을 붙여 썼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성냥∙양지 종이∙노트∙고무∙공은 일제가 석권했지만, 일제 강점 뒤에도 구두와 양말은 국산이 일제를 능가해 일본 제품을 많이 팔아먹지 못했다. 나중에 신사들한테 유행한 백구두는 대단한 호사품이어서 박가분을 뿌려서 흰 칠을 했는데, 분이 없으면 백묵 가루라도 칠했다. 한강물 절반은 강원도서 내려오는 물이고 절반은 서울의 생활하수가 그대로 흘러 들었다. 겨울엔 그 물을 얼음으로 잘라 팔았다.(128쪽)
메이지(明治)대학에서 수학한 일본 유학 시절도 흥미롭다. 특히 1920년 전후 도쿄의 조선 유학생이 1천명이었지만 예과부터 본과까지 대학 5년 과정을 다 공부해 학사학위를 얻은 사람은 한 학년에 10명도 안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이른바 '전문부'라는 과정을 1~3년 다니거나 강의록으로 공부했다. 그가 다닌 메이지대학만 해도 본과생은 정치·행정·법학·상과·경제의 5개과를 다 합쳐 140명밖에 안되었고, 전문부 학생은 1만명이었다니 말 다했다.
일본의 5대 대학 중에서 전문부가 없는 대학이 도쿄대와 게이오대 둘뿐이었고 졸업생에게 교수 자격증과 영어교원 자격증을 주는 대학은 메이지대와 게이오대 둘뿐이었다. 와세다대 같은 곳은 명문이지만 5년 과정을 졸업해도 자격증이 없어 변변한 취직자리 얻기가 어려운 우골탑(牛骨塔)이었다는 얘기다. 그가 검정고시를 치르고 메이지대에 입학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당시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조선에 돌아와 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전문부 학력을 가지고 '대(大)학자'라고 해도 통했는데 오직 총독부만이 정확히 이들을 구별했다는 것이다.
최태영은 법학과 20명의 졸업 동기생 중에서 법학 교수 자격과 함께 유일하게 영어교원 자격증 따서 귀국해 1924년부터 보성전문 법학 교수와 경신학교 영어 교사 겸 부교장으로 부임해 1945년까지 겸임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1940년 외국인선교사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기 전에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싸고 장로교 비밀회원 5인이 회동할 때 한국인 옵서버로 참여한 최태영의 증언도 무척 흥미롭다. 쿤스 교장도 비밀회원 5인 중 1인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신사참배였다. 원한경은 장로교 비밀위원의 일인으로 연지동 겐소 선교사 집에서 1937년 정월에 열렸던 5인 비밀회의 및 숭실전문에서 열린 1937년 6월 평양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반대결의를 이끌어냈다. 이 사실은 5인 비밀회의와 평양 장로교 총회 때 한국인 업서버로 참가했던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한 것으로 이에 밝혀둔다."(320~321쪽)
최태영은 무장으로 투쟁한 투사는 아니었지만 조선의 이권과 정신을 일본에 뺏기지 않기 위해 지식인으로 할 수 있는 애국을 했다. 학자이자 항일 교육자로서의 진면목은 해방 얼마 전 총독부 주최로 열린 '일본어 상용(常用) 완전실시 방책 토의'에서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총독부 학무국장(교육부장관), 경성부윤(서울시장) 등 일본인 관리들과 한국인 교육자 3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 선생도 보성전문 대표이자 경신학교 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후루이치 경성부윤이 서울의 학교장 4명을 지명해 연설토록 했다. 앞에서 세 교장이 적극적으로 일본어 상용을 주장한 것과 달리 그는 "일본말을 상용토록 하는 것은 안될 말"이라며 '평생에 한 연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연설'을 하게 된다.
"4천 년이 넘게 써온 조선말이다. 조부모는 일본어를 못한다. 우리 부모 세대도 알본어를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어를 상용하라는 것인가. 저희 나라 말을 저희 집에서 하는 걸 가지고 엄벌을 하자 하나 말이 그렇지 실제로 벌을 주지 못한다. 또 아름답고 고급한 일본말을 쓰자니 보통 사람은 보통 말만 하려해도 죽을 지경인데 모슨 고급 상등 일본말을 쓰게 한단 말이냐. 꿈도 일본어로 꾸자는 게 무슨 소리냐. 생시에도 안되는 걸 어떻게 꿈에 할 수 있단 말이냐.…이 회의를 파하고 나가면서 우린 당장 조선말로 이야기 나눌 것이다. 생각해 봐라. 그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다.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하면 반감만 더해질 것이다."(236~237쪽)
그가 강의한 보성전문과 여러 대학에선 상법과 법철학이 주 강의과목이었다. 최태영은 '소절수'라는 일본어 대신에 '어음'이란 우리말을 되살려 이를 정착시켰다. 책을 귀하게 여긴 학자의 면목은 해방이 되어 한국에서 쫓겨가는 일본들이 귀한 책을 들고 가면 빼앗을 요량으로 부산까지 내려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한국을 떠나는 일본인들의 짐(책) 검사를 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했다.
"내가 순하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처세술이 부족한 곰이었던지도 모른다. 그래도 학생들이 내게 '한마디 말을 써 달라'고 오면 '한결같이 살자'고 써주었다. 그 평범한 말은 한평생 내가 지켜온 길이도 했다."(240쪽)
근대 1세대 법학자이자 역사가인 최태영은 그의 말대로라면 "하루라도 책 없인 못사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이 그저 좋아 많이 읽었다." 그가 11살 때 눈 덮인 산 넘어 외할머니 문중 산당에 〈동몽선습〉 책을 가지러 간 것이 그의 일생에서 '책의 여행'에 내디딘 첫발이었고 후일 단군 연구의 첫 실마리가 되었다. 그가 책에 쓴 '독서일기'는 장서의 가치를 아는 애서가들이 꼭 읽어볼 만한 글이다. 그는 말년에 요양원 병실에 있을 때도 학술원 법학분과 모임에 나갔다. 그의 마지막 외출은 2004년 5월 학술원 50주년 때 무궁화훈장을 받던 날이었다.
이번에 나온 〈나의 근대사 회고〉,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한국 법철학연구〉 전집 1차분 3종은 근대사와 고대사, 한국법철학 관련 그의 기존 저작과 논문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다. 선생의 말년에 7년 동안 자택과 요양원을 넘나들며 원고와 책을 정리한 눈 밝은 언론인 김유경(전 경향신문 문화부장대우)씨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런 전집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출판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집을 낸 눈빛출판사의 용기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다만 고대사와 법철학은 현실에 집착(?)하는 기자인 나의 관심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리뷰는 다음으로 미룬다.
2010년 유종필 전 관악구청장이 국회 도서관장을 할 때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간도서관(Living Library 또는 Human Library) 행사를 한 적이 있다. 이는 관련 지식을 가진 사람이 독자와 일대일로 만나 정보를 전해주는 도서관 역할을 하는 것으로, 휴먼 라이브러리에서 독자들이 빌리는 것은 책이 아니라 사람(Human Book)이다. '사람책'과 독자가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자는 게 휴먼 라이브러리의 취지다. 독자들은 휴먼북 목록을 살펴보고 읽고 싶은 휴먼북을 선정해 휴먼북과 마주 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경험을 읽기 때문에 종이책에서 느낄 수 없는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와 경험, 그리고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다.
궁금한 점을 바로 물어볼 수 있다는 것도 휴먼 라이브러리의 매력으로 꼽힌다. 그때 '정보기관 전문기자'의 직함으로 휴먼북이 된 경험이 있는 내가 보기에, 최태영 선생은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인간도서관'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가 가고 안 계시니 그가 쓴 책만큼은 전국 공공도서관에 비치해 사람들이 지면으로나마 그와 대화하면 좋겠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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