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하게 도전. 결과는 나중. 내안의 무엇을 찾아라" 후학에 전하는 고견
'역상조각' 다양한 각도 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 계획…"한번쯤 짚고 가야"
수십 년 전 서울 북한산에서 발원한 홍제천 지류가 만나는 곳에 성긴 진흙을 고사리손으로 뭉쳐 무언가를 만들던 꼬마가 있었다. 매일 흙 놀이를 하던 아이는 중학생이 되어선 집 마당에 땅을 돋워 형상을 만들며 놀곤 했다. 아이는 이런 것이 '부조(浮彫)'인지 알 턱이 없었지만, 그저 이런 놀이가 좋았다.
천생 조각가의 운명을 타고난 건가. 아이는 훗날 '역상조각(Inverted Sculpture)'이라는 신장르를 개척하며 국내외 미술계에 큰 명성을 얻었다. 주인공은 서울대학교 조소과 이용덕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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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각가 이용덕 [SimGreen, SayArt] |
25년 후학을 이끌던 그는 다음 달 퇴임을 앞두고 있다. "헝그리 정신을 잊고 긴장감을 잃은 채 산 멋없는 삶이었다"면서 "이제 다시 40대 초반의 불안정으로 돌아가 작업에 매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후학들과 함께한 시간에 대해선 "그들에게 끝없는 순수함과 무모함에 대한 미학을 배웠다"며 지난 세월의 가치를 회고했다. "잃어버린 다른 한 손을 찾은 듯하다"며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도 숨기지 않았다.
새출발을 말하지만, 사실 이용덕은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있는 작가다. 특히 그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역상조각'은 세계 미술사적으로 유의미하다. 이미 그의 작품 200여 점이 세계 곳곳에 펼쳐져 있으니, 한국인이라면 자긍심마저 느낄만하다. 그의 역상조각은 독일 베를린 슐뮤지엄, 중국 국립미술관, 마카오 미술관, 상하이 다륜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전시 무대에 올랐다. 국내외 19차례 개인전과 100여 회 단체전에서 그의 작품이 관객을 만났다. 그를 '조각계의 한류스타'라고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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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용덕 작 '위대한 결집' [작가 제공] |
역상조각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은 국내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의 안중근 의사상(조각)과 서울 동작구 '삼일공원'의 유관순 열사상(역상조각)을 비롯해 '명동성당'의 김수환 추기경상(부조)과 프란치스코 교황상(부조) 등이 그의 작품이다. 지난봄에 서울 용산역 광장 'ROKAUS'(로카우스, 용사의 집) 앞에 들어선 높이 8.2m의 작품 '위대한 결집'도 빼놓을 수 없다. 4개의 기다란 금속막대를 성냥을 쌓듯 올려 국가에 충성하는 용사의 모습을 표현한 이 작품은 빛이나 시선의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이 나타나 살아있는 듯하다.
서울 '관훈클럽'의 정주영·정신영 형제상과 '포스코사옥'의 박태준 회장의 조각상은 '역상조상'의 신비를 직접 보여준다. 작품은 관객들의 시선에 따라 입체로 튀어나와 보이고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저절로 움직이는 듯 마술 같은 현상을 선보인다. 한동안 관객에 시선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 ▲ 역상조각 2003 [작가 제공] |
그를 대표하는 '역상조각'은 무엇일까. 역상조각은 일반 부조와 달리 외형적으론 오목하게 패진 게 특징이다. 일반 부조와 구조적으론 반대이지만, 작품은 오히려 입체감 있게 앞으로 튀어나와 보인다. 이런 '역상법'엔 깊은 철학적 사유가 흐른다. "있으면서 없는 것. 없으면서도 있는 것. 있다는 것이 없다는 걸 증명하고, 없다는 이유로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그런 경계 상황을 작품으로 저장하고 싶었다"며 역상조각의 시발을 설명했다. 사실 그의 이야기는 "어, 사람이 빠져나겠네"라는 꼬마 관객의 한 줄 평으로도 함축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엔 음양이 서로 교차하는 동양 사유 체계부터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이 단숨에 녹아있는 셈이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셈이다.
종합하면 역상조각은 존재와 비존재의 혼재성(混在性)을 다루는 고도의 철학적 장치가 숨겨져 있다. 더러 이를 두고 경계를 다루는 것으로도 오해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경계는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만나는 곳'을 말하니 상반된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닐 수 있다. "채워졌다는 건 비워진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고 비워졌다는 건 채워졌었다는 것을 가정해야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굳이 경계로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게다. 이런 철학적 사유는 사실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틀이 없거나 경계가 예술'을 지향하려는 그의 작가정신에서 발현된 것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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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업실을 둘러 보고 있는 조각가 이용덕 [SimGreen, SayArt] |
역상조각은 말 그대로 '대박신화'를 낳았다. 그를 대표하는 상징적 작품체계, 즉 본류가 됐으니,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최근 10여 년, 이 작업을 내려놓기도 했다. 미학적인 가치보다는 투자 대상으로 변질한 역상 작품에 대한 작가의 고뇌 때문이었다. 작품을 떠나보낼 때마다 "시집을 보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작품들이 재무투자의 대상으로 됐다고 생각하니 작업실 문을 열기가 힘들었다는 설명이다.
그에 대한 오해도 있을 법하다. 작가로 입신하고 오랜 기간 명문대학의 교수로 살았으니 그저 평탄한 삶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일찌감치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받았으며 승승장구했지만, 돌연 독일 유학을 감행했다. 스스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욕구 때문이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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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상 [작가 제공] |
낯설고 물설어 고생스러운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는 그렇게 내려놓고 감행한 새로운 도전에 자신을 던졌다. 그의 예술혼은 독일 현지에서도 발현됐다. 1994년 가을, 베를린의 한 벼룩시장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을 토대로 작업한 '소년상'이 그것이다. 1920년 10월 24일 한 초등학교의 1학년 학급의 사진. 1차 세계대전 직후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던 시대의 슬픈 표정의 아이들 모습에서 그는 아이들의 삶의 궤적에 대한 궁금증이 발동했다. 취학 전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했고 20대엔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대상이 됐을 아이들. 이 교수는 당시 일생 중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33명 아이 표정을 하나하나 조각상에 담았고 이 조각상들은 큰 반향을 불러왔다. 이런 그의 작업은 일그러진 우리 현대사와도 그 무엇과도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1997년 베를린 '슐뮤지엄'에서 첫선을 보인 후에도 10년 동안 여러 곳에서 전시돼 관객의 큰 호응을 불러왔다.
그는 강단에 있는 동안에도 틈틈이 여러 작품에 매달리며 자기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무사안일에 빠질 수 있었지만 100여 회 넘는 전시를 이어온 것 자체가 그의 끊임없는 도전을 설명한다.
| ▲ Walking together [작가 제공] |
그가 후학들에게 "용감하라"고 전하는 메시지도 사실 자신이 감행한 무모한 독일 유학이나 끝없는 자기 도전 역사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도전하고 싶은 게 무조건 도전하길 바란다. 그냥 덤벼야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은 나중 문제다. 누구나 자기 안엔 정말 놀라운 무언가가 있으니 그것을 꺼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무모한 용감함이나 도전'이 현재의 역상조각을 세상에 나오게 한 원동력이었을지 모른다.
이 교수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역상조각에 대한 미술사적 조명을 위해 올해 심포지엄이 열린다는 얘기다. "올해 6월쯤 토탈미술관 주최로 전문가 6~7명이 모여 역상조각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린다. 현장에서 나온 여러 전문가의 이야기를 모아 출판 계획도 있다. 역상조각의 외형적 형식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측면도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다. 이 장르가 어떻게 관객에게 행복감을 주었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전문가의 의견을 모을 예정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역상조각의 의의나 특성을 학문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가 있었다. 세상에 나온 지 40년이나 지났으니 이젠 미술사적으로도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고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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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ncounter 2014 [작가 제공] |
두 손을 찾았으니 하고 싶은 작업도 봇물 터지듯 솟아오른다고 했다. 이 교수는 역상조각 이외에도 다양한 형식의 작품도 계획하고 있다. 이미 국내외에서 여러 전시 요청이 있지만, 그의 대답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대답이 전부다. 1~2년 더 깊이 사유하고 작품에 매달리고 싶다는 이유다.
홍제천에서 진흙놀이 하던 아이는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다. 조각가로 입신했지만, 인터뷰 중 그의 눈가엔 아직 그 시절 아이의 눈빛이 서려 있었다. 꼬물꼬물 빗던 아이의 꿈은 이제 세계 곳곳에 그의 이름을 달고 생명을 얻었다.
사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사색을 던지는 잠시 거쳐 가는 인생 '무엇이면 어떤가'라고 말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전을 시작한다"는 조각가 이용덕 교수가 되찾은 두 손으로 무엇을 빚어낼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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