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세대의 광주 비극을 자신의 눈높이로 재해석
4·3의 비극, 생명 향한 지극한 화해와 치유의 노래로
"평범한 저녁에 접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 소식"
소설가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 독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쾌거다. 여성작가로는 18번째이고 한국 노벨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이래 두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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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내셔널 맨부커상 수상 무렵에 만난 한강.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해듣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소식"이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그동안 고은 시인과 소설가 황석영, 이문열 등이 꾸준히 수상 후보로 거론돼 왔다. 매년 노벨문학상 발표 시즌이면 이들 집 앞에서 기자들이 진을 치기도 했다. 이러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한림원에서는 오랫동안 응답이 없었고, 노벨문학상은 서구인들의 잔치로 폄하되기도 했다. 이제 세대가 바뀌어 '젊은' 한강(54)이 한국의 역사적 수혜자가 됐다.
한강은 장편 '채식주의자'로 2016년 인터내셔널 부문 맨부커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지명도가 높은 작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강이 광주항쟁을 그들 세대의 눈높이에서 재조명한 '소년이 온다'는 그의 작품군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소설로 평가된다.
2014년 펴낸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이들을 다시 불러내 그네 세대의 눈높이로 재조명한 작품이다. 영국 독자와의 만남 당시 한 독자가 이 소설을 특정 공간의 과거사가 아닌 인간의 폭력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채식주의자'를 한국만의 특수한 가부장적 상황에 대한 고발로 오독했던 이들도 '소년이 온다'를 통해 오히려 한강이 폭력에 대해 일관되게 말하고 있음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한강은 광주시에서 태어나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4개월 전인 1980년 1월, 열한 살 때 서울로 이사왔다. 후일 아버지가 보여준 '광주 사진첩'은 사춘기에 접어드는 그네의 감성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들 가족만 참극을 피해 도망온 듯한 부채의식에도 시달렸다. 그러한 감정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폭력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무의식에 깊이 새긴 듯하다. 그네의 아버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소설가 한승원. 한국 문단에 소설가 부녀는 더러 있지만 대를 이어 '이상문학상'을 받은 이들 부녀처럼 또렷한 경우도 드물다. 출간 당시 그가 밝힌 배경.
"밤에는 소설 쓰느라 잠을 못 주무시고 낮에는 교사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언제나 피곤한 모습이셨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성장한 저로서는 어릴 때 작가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피곤한 일이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사춘기 접어드는 중학교 때부터 인간은 왜 태어나고 죽어야 하는지부터 제 안에 너무 많은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집 안에 널려 있는 책들을 보면서 살았는데 이때부터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작품들을 읽었어요. 읽다 보니 작가들에게도 별다른 답이 없고 오히려 저처럼 연약하고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 ▲한강의 소설은 초기작부터 깊은 물속에서 힘겹게 숨을 참는 듯한 낮고 어두운 풍경이었다. 한림원은 그의 작품을 두고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의 이중적 노출, 동양적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통의 대응이 특징"이라고 평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한강은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습작을 시작했다. 대학 문학상에 시를 응모해 상을 받기도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시 쓰는 학생이었지만 안으로는 몰래 소설을 쓰는 문학청년이었다. 1993년 겨울 '문학과사회'를 통해 시인이 되었고 곧바로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는 소설가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 그가 몰두해온 장르는 소설이었다. 그네의 소설들은 초기작부터 깊은 물속에서 힘겹게 숨을 참는 듯한 낮고 어두운 풍경이었다.
"저에게는 언제나, 지금까지도 해결 안 된 문제들이 있어요.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죽고 고통받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는데 내가 행복해도 되는 건지, 내가 가벼워도 되는 건지 그런 확신이 없어요. 살아 있는 건 잠깐인데 아름다운 걸 봐야지 하는 건 30대 중반 지나면서 든 생각이고, 20대 초중반에는 더더욱 내가 행복할 수 있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것도 생각해보면 광주와 연관이 된 건지 모르지요."
한강의 소설들은 어둠 속에서 한 점 빛을 향해 안간힘을 쓰며 기어나온 기록으로도 읽힌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는 주인공이 자살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집요하게 밝혀나가며 불타는 공간에서 기를 쓰고 기어나오는 마지막 장면을 썼다. 장편을 하나씩 써나가면서 느리지만 생에 대한 긍정과 인간의 존엄을 찾아가는 도정을 걸어왔다. '희랍어 시간'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무엇을 통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좀 더 가본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다음에는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정말 눈부신 삶을, 아름다움을 껴안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더 나아갈 수 없었고, 결국 광주의 트라우마를 꿰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소년이 온다'를 쓴 것이라고 했다. 쓰는 내내 인간의 폭력이 끔찍하고 희생자들이 안타까워 악몽을 자주 꿀 정도로 힘들었는데,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새벽을 맞은 이의 일기를 접하고 그들이야말로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행위자로 나선 존엄한 이들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시 써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말미에 죽은 소년이 엄마 손을 이끌고 빛을 향해 나아가거니와 한강은 "제 힘으로 쓴 게 아니라 그분들이 끌고 갔던 것 같다"고 말했다. '희랍어 시간'이 시적인 밝음을 향해 나아갔다면 비로소 가장 어두운 부분을 통과하며 깊은 곳에서 강렬하게 올라오는 두터운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에 이어 한강의 이름을 글로벌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장편은 제주 4·3항쟁을 담은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한강은 이 장편을 펴내고 기자들과 온라인으로 간담회를 하면서 소감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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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위원회 공식 SNS에 한글과 함께 2024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소개된 한국 작가 한강. [노벨위원회 X캡처] |
이 장편은 광주 학살을 다룬 장편 '소년이 온다'를 펴낸 이후 악몽에 시달리던 소설 속 작가 '경하'가 꾸는 꿈으로 시작된다. 키가 다른 검은 나무들이 앞으로 펼쳐져 있고 뒤로는 능선까지 심어진 이 나무들 사이로 밀물이 밀려오는데 봉분의 뼈들이 떠내려갈까 걱정하며 능선 쪽으로 뛰어가는 꿈. 이 꿈은 제주 출신 친구 '인선'과 더불어 퍼포먼스를 계획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인선이 나무를 다루다 손가락이 잘려 입원하면서 이야기는 제주 4·3의 비극으로 나아간다.
경하는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 중산간지대 인선의 집에 남겨진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나아가다 길을 잃고 눈 속을 헤맨다. 결국 새를 살리지 못한 채 경하는 서울 병원에 있는 인선의 환영과 내내 대화를 나눈다. 인선의 노모가 어떻게 4·3의 학살에서 오빠와 여동생을 잃고 그동안 어떤 노력들을 기울이다 죽었는지, 눈의 이미지 속에 시종 그날들의 비극이 시리게 전달되는 얼개다.
"모든 소설을 쓸 때 그 소설이 요구하는 마음의 상태가 있는데, 벗어날 때도 많지만 최대한 그 상태에 근접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소설이 요구한 것은 지극한 사랑의 상태였습니다. 특히 후반부는 환상성이 있는데, 저는 사랑이라는 것이 나의 삶만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동시에 살게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내가 여기 있지만 동시에 그곳에 있게 되는 것이고, 간절히 그러하기를 기구하는 그런 상태 자체가 초자연성을 지니는 것이죠. 이 소설 속 인물들의 마음이 그런 간절한 상태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불가능하지만 애써 보았던 소설입니다."
한강은 '경하'가 새장에 갇혀 돌보는 이 없는 상태에 처한 앵무새 '아마'를 살리기 위해 제주 중산간 지대의 거친 눈보라 속을 헤매게 만들었다. 젖먹이들까지 무참하게 학살된 비극을 이야기하면서 작은 새 한 마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아무리 여리고 작아도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은 어떤 명분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소설에서) 새는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 그 어떤 것"이라고 말했다.
한강은 '광주 학살'을 다룬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는 "삶의 어떤 부분에 악몽이나 죽음이 깊이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면서 "그 상태에서 이 소설과 함께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오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지극한 사랑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기보다는 이 소설이 나를 구해줬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한강은 "이제 죽음에서 삶으로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 쓰려는 방향은 다른 길이 될 것 같다"면서 "몇 개 이야기가 마음속에 맴돌고 있는데 결은 이 소설과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한강의 수상은 그동안 꾸준히 진행돼온 번역 지원의 결실이기도 하다.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으로만 28개 언어권 76종이 현지 언어로 출간됐고, 민간 단체 지원까지 포함하면 더 큰 폭으로 늘어난다. 대산문화재단은 2014년 '채식주의자'를 데보라 스미스 번역으로 영역을 지원해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한강의 작품 8종을 지원했다.
마츠 말름 한림원 의장은 10일 "한강 작가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면서 "한 작가는 '아들과 막 저녁을 먹은 뒤였고 평범한 하루였고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강은 이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최고의 소식"이라며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감격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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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은 이제 "죽음에서 삶으로 나왔다"고 밝힌 바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한강 연보
▲ 1970년 1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태어남
▲ 1988년 풍문여자고등학교 졸업
▲ 1993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계간 '문학과 사회'에 '얼음꽃' 외 4편의 시로 등단
▲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으로 당선되며 소설가 데뷔
▲ 1995년 소설집 '여수의 사랑' 출간
▲ 1998년 장편소설 '검은 사슴' 출간
▲ 2000년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출간
▲ 2002년 동화책 '내 이름은 태양꽃',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 출간
▲ 2003년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동화책 '붉은 꽃 이야기',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출간
▲ 2007년 소설집 '채식주의자' 출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임용
▲ 2010년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출간
▲ 2011년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출간
▲ 2012년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 출간
▲ 2013년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출간
▲ 2014년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출간
▲2016년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부문 수상, 장편소설 '흰' 출간,
▲ 2017년 이탈리아 말라파트테 문학상 수상
▲ 2019년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 2023년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
▲ 2024년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 수상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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