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는 바다의 시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3-09-08 11:43:54
등단 50년 맞아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펴낸 김명인 시인
줄기차게 천착한 바다의 심화된 이미지, 묵직한 삶의 질문
중심보다 '둘레'가 자주 보이는 생의 황혼, 담담하게 진설
"생생한 경험 스며든 시편들, 리얼리티 강한 내 삶의 편린"
김명인(77) 시인이 시업 50년을 맞아 열세번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그가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호명해온 바다에 대한 성찰이 더 깊어졌고, 삶의 무게를 묻는 존재론적 천착이 눈에 띈다.

▲5년 만에 열세번째 시집을 펴낸 김명인 시인. 충만한 절정의 시간이 지나가도 생은 여전히 이어지는 것이라는 성찰이 돌올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바다는 그의 성장기에 늘 곁에 있었던 환경이다. 동해 후포에서 나고 자란 그가 태백산맥을 넘어 대처로 올라온 것은 유소년기를 바다와 보낸 이후 청년기에 접어들 때였다. 그가 두고 온 바다는 시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산맥 너머 대처살이의 상념과 생에 대한 통찰이 투사되는 대상으로 줄곧 작용해왔다. 이번 시집 서두에 내세운 '죽변 도서관'은 그가 반세기 내내 들여다본 바다에서 길어낸 절창 중 하나다.

책 만 권을 한꺼번에 펼친 바다가/ 기슭의 파란까지 덮어버렸으니/ 일몰 이후에나 대출된다는 밤바다는/ 평생을 새겨도 독해 버거운/ 비장의 어둠일까, 이 도서관의 장서려니/ 갈피나 지피려고 주경야독한다는/ 어부들의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일생을 기대 읽는 창窓이야/ 시인의 일과처럼 갈짓자 행보지만/ 알다가도 모를 달빛을 지표 삼아/ 어둠으로 안내하는 사서의 직업이란/ 그다지 참견할 일이 못 된다/ 다만 그 일로 한두 시간 끙끙거리려고/ 삐꺽대는 목조 계단을 밟고 오른다/ 이 도서관이 대출하는 장서라면/ 파도 한 단락조차 내게는 벅찰 것이니/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겠다! _'죽변 도서관'

시인은 고향인 후포 인근 죽변의 바닷가 언덕 위 작은 도서관에 초청돼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밟고 올라가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에서 20여 명과 이야기를 나눈 것인데, 이때의 체험이 강렬하게 남아 시에 투사됐다. 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는 '책 만 권을 펼친' 장관이었고, '일몰 이후에나 대출된다는 밤바다'는 평생 읽어왔어도 '독해 버거운 비장의 어둠'이었다. 시인이란 존재는 그에게 '알다가도 모를 달빛을 지표 삼아/ 어둠으로 안내하는 사서의 직업'이다. 이 사서는 겨우 달빛에 기대어 어둠을 안내하지만 사실 '파도 한 단락조차'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파도는 쉼 없이 단락을 넘기고 누군가는 여전히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는 중이다.


"파도가 치면 물결이 이니까 책 만 권이 펼쳐지는 형상이죠. 읽어낸 것들을 여러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려고 애를 쓰는 시인의 업이 사서의 일과 비슷합니다. 이 사서의 직업도 광대무변한 동해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죠. 우리가 어떻게 읽어내든 바다는 여전하고 우리는 왜소할 테니까. 절망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아요. 그게 삶이니까. 시인은 절망을 딛고서 끊임없이 시를 쓰는 사람인 거죠."

전화로 만난 김명인은 "누군가 읽고 있는 첩첩 어둠이란 생을 포함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라면서 "우리가 가는 길 자체가 생소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되는 그런 길이고, 목숨이 붙어있는 한 끈질기게 살아내는 그런 생활 여정"이라고 덧붙였다. 바다 도서관의 장서는 '서해'에도 펼쳐져 있지만, 책의 질감은 다르다.

만 장을 넘겼는데/ 아직도 저 파란!// 발치를 적시다 몸통까지 잠기는/ 생각이라 하지 말자// 밀물이 가두면/ 제풀에 지워지는/ 개펄같이! _'서해'

발치를 적시다가 몸통까지 잠기는 개펄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밀물이 닥치면 하릴없이 속수무책 지워지는 것 또한 개펄이다. 시인은 지난해 그 밀물에 잠시 지워진 적이 있다. 저혈압으로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가 깨어났는데, 깨고 보니 그 과정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드넓은 국면들이 그렇게 밀려들어서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내의 존재가 아닌가, 그때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고 전했다. 

임종 무렵의 어머니는/ 지워지는 둘레에 골똘한가 보았다/ 눈가 묽어지는 저물 무렵/ 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반짝이는 석양을 켜 들곤 했으니/ 회상으로 떠올리면/ 첫눈 맞는 갈참나무숲이/ 한참이나 산자락을 잡아두는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땅거미/ 물고 오는 오늘의 어스름 속/ 희끗희끗 섞이는 눈발,/ 눈 감아 선연한 회상이라 해도/ 이내 깜깜해질 저런 풍경을/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로 담아 가려 하셨을까? _'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김명인 시인에게 '바다'는 평생 삶을 투사해온 '경전' 같은 것이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바다는 시인이 내내 천착해온 소재이지만 '둘레'는 이번 시집에서 새롭게 자주 등장하는 시어다. 이즈음 중심보다는 둘레가 더 자주, 잘 보인다는 시인에게 그 둘레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과 함께 겹쳐진 바다는 애틋하고 막막하다. 시인의 모친은 임종 때 유달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가 둘러보고 떠난 '둘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둘레가 온통 수평선이라면/ 초점은 둥근 원의 중심,/ 입체는 아득하게 구축되어/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다"면서 "가없는 둘레에 싸여도 중심은/ 언제나 한 점,/ 일찍이 접합되지 못한 우주에 사로잡혔으니/ 나 하나의 값은 없다"('초점의 값')고 썼다.

"내가 중심이라는 것을 나를 감싸고 있는 세계에 비춰 보는 거죠. 그래서 내 세계의 중심은 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텐데, 거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수많은 주변들을 둘러보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죠. 제 시는 제가 의식하고 겪었던 체험과 그렇게 멀리 가 있는 그런 시가 아닙니다. 좀 둘러서 표현하고 있지만 생생한 경험들이 거기에 배어들고 있어서 어쩌면 한편 한편은 제가 느끼기에는 리얼리티가 아주 강한 시라는 생각이 들죠. 실존의 바탕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환상을 그려내는 시들과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시간은/ 입동에 떠밀린 고요니/ 묽어진 가을 산과 거기 잇댄 / 능선을 나는 빌렸다/ 무료조차 덤이라면 이 풍경,/ 혼자 누리다가 동지冬至 편으로 네게 보내겠다/ 한때 지천을 부풀리던 초록이여,/ 나는 맘과 셈의 낭비가 심한 사람/ 물려줄 생각보다 빌려 쓸 궁리가 앞선 사람/ 어느새 탕진하고 여기 서 있다/ 이로부터 내 표적은 지워질 것이니/ 누가 남아 눈에 파묻힐/ 적막을 들춰보겠느냐! _'차견'

'차견借見'은 '남의 서화 따위를 빌려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적 화자에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가 주체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누군가에게 빌려온 것이다. 그는 "돌이켜보면 뿌리를 지상에 잘 두고 있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가끔 생각한다"면서 "삶 자체를 길을 떠나든 안 떠나든 한 곳에 있든 없든 간에 여행의 구조로 읽어내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태 전 그는 30여 년 붙박이로 살던 단독주택을 떠나 청계산 입구 골짜기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창 밖 산 위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자주 보는데, 그는 이 풍경을 두고 '구름 척후'라는 시를 썼다. 누군가 지상을 살펴보라고 보낸 척후로서의 구름, 그 뜬구름 또한 시인의 정체성일 터이다. 그는 살던 집 마당에 두고 온 100년 넘은 모과나무가 그리워 '유령거미의 시간'을 썼다.

▲김명인 시인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게 내 시가 아닐까 싶다"면서 "기운이 있는 한 지속되었으면 좋겠고, 애를 쓰는 노력이 흔적으로 남겨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어떤 몸이든 병이 들고 허기지면/ 안개 속으로 저를 운반하는/ 무적 소리의 환청에 자주 시달린다/ 마당귀 늙은 모과나무도 저를 깨워내는/ 바람 소리에 이따금씩 잎새를 펄럭일까,/ (…)/ 모과나무에 이상한 새가 앉아서 운다/ 낯선 손님에게 가지를 내주고도 무심한 것은/ 몰년을 잇대는 유령거미의 시간,/ 가라앉을 듯 가라앉은 듯 어둑한 둘레가/ 거미의 군락지로 넓혀지고 있다 _'유령거미의 시간' 부분

"뿌리를 잃어버린, 지향이 없는 구름 같은 생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살게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죠. 줄을 쳐서 정처를 만들려고 하지만 텅 빈 집을 가지는 게 유령거미 아니겠어요? 어떤 때는 문득 밤에 자다가 일어나 응접실로 나오면 섬망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고 내가 그 속에 사는 거 아닌가 싶어요. 처음에는 그게 정신적으로 좀 섬뜩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아, 내가 거미인데 내가 그런 곡두인데 그게 무슨 겁날 일 있겠느냐는 생각을 해요."

평생 줄을 쳐서 집을 지어 왔지만 텅 빈 집밖에 갖지 못한 유령거미의 삶. '몰년'에 드는 이런 스산한 자각은 그럼에도 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옥수수 시간'이 있기에 헛헛하고 담담하다. 그가 매일 둘레를 산책하면서 생장 전 과정을 관찰하게 된 옥수수를 두고, 한때 충만하게 '익는 것'이지만, 겨울바람에 허수처럼 빈껍데기로 흔들려도 '있는 것'이라고 썼다. '시인의 말'처럼 "지금은 경작의 애락哀樂을 내려놓아야 할 때!/ 비가 오지 않는다고 탄식하던 농사의 시절은 지났다"지만, 생은 여전히 오롯하다. 

자진 장마 지나가는 7월 한철로/ 옥수수 시간은 익는 것이다/ 어느새 훌쩍 자란 진초록 건너가며/ 옥수수, 매단 수염은 넉넉해지는 것이다/ (…)/ 옥수수, 가을이 허전한 허수들/ 북적대던 둘레가 비워지고/ 우수수, 메마른 키 바람에 베어져도/ 옥수수 시간은 있는 것이다 _'옥수수 시간'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