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간 관계에서 이견과 갈등 불가피
李 대통령 '굴종·사대 지양' 발언 당연
안보 알레르기 벗고 국익외교 지향해야
이견과 갈등 조율이 외교와 외교관 몫
외교전선에서 열심히 뛰도록 지원 절실
"한미가 조금 어려운 시기, 난기류(turbulence)를 겪고 있다." 지난 21일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가 공개 석상에서 한 말이다. 부임한 지 3개월이 채 안 된 미국대사 발언이라서 놀랍다. 현란한 상찬(賞讚)과 수사(修辭)가 오가는 곳이 외교 무대다. 조그마한 갈등도 매끄럽게 다듬어 표현하는 이들이 외교관이다. 스틸 대사가 전문 외교관 출신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래도 동맹인 양국 관계를 주한 미국대사가 '난기류'라고 표현한 자체가 이례적이다.
얼마 전 강경화 주미 한국대사 발언과 비교하면 사실 놀랄 건 아니다. 그는 12일(현지시간) 주미대사관 국정감사에서 한미 외교 속살을 그대로 보여줬다. "국가안보회의(NSC), 백악관 주요 인사들과 면담을 자주 하지만…고위급에서의 협의는 지금으로선 저도 답답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만큼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미 외교의 답답함을 최전선 지휘관이 토로한 것이다. 그날 강 대사가 함께한 "미국의 지지와 유대는 굳건하다"는 발언은 힘없이 들릴 수밖에 없었다.
국가 간 이견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동맹을 넘어 혈맹 관계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함께 꿈꾸며 수십 년을 해로한 부부도 수없이 티격태격하지 않는가. 이견을 조율해 갈등을 줄여가기 위해 외교가 필요하다. 외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사소한 문제도 도드라져 보인다. 이웃이 사이좋으면 현관 앞 거친 구둣발 소리도 안 들리지만, 사이 나쁘면 거실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조차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
한미 관계에 이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여럿이다. 지난 2월 주한미군 전투기 서해 훈련을 둘러싼 사과 논란, 3월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북한 구성 핵시설 발언을 빌미 삼은 정보 공유 문제, 6월 북한 해킹 대응을 위한 한미일 사이버위협 대응협의체 회의 배제, 8월 한미 연합훈련 축소 논란…. 지난해 말 약 3755만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한 쿠팡의 무책임까지 덮쳤다. 한국에서 사업하는데도 미국 회사임을 내세워 미국 정치권에 펼쳐온 로비 공세의 불똥이 외교 전선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작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이 대통령은 13일 국무회의에서 "국가 간에는 이견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이견을 최소화할 필요도 있고, 그 이견들이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야 되겠다"라고 했다. "한미 동맹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외교의 축이라 할 수 있다"면서도 "국가 간 관계에 있어 굴종적 태도나 사대적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발언도 했다. 그가 강조하는 실용적 국익외교의 지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굴종·사대주의 배격은 굳이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지극히 옳다. 중국이든 미국이든 패권 앞에 허리를 굽혀서도 국익을 훼손해서도 안 된다. 중국에도 제 목소리를 내고 미국에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공급망, 녹색성장, AI규범 등 글로벌 이슈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한미 관계에서 안보 알레르기가 오랫동안 우리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전시작전통제권만 하더라도 환수 가능성을 아예 따져보려 하지도 않은 채 미국에만 의존하려는 이들이 있다. 70여 년 전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다. 상호 파멸을 부를 최후 수단인 핵전력을 뺀 남북한 군사력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미국이 "한국은 더 이상 미국이 보호해줘야 하는 나라가 아니다"(미셸 대사)고 여길 정도다.
패권 국가에 굴종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있기 마련인 이견과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그 이견을 도드라지지 않게 하고 싸움으로 커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이런 일을 협상 테이블에서 풀어내는 일은 결국 외교의 몫이다. 외교관이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정부와 정치권이 할 일이다.
외교관들을 만나보면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재외공관장 상당수가 특임공관장으로 채워졌다. 엘리트 외교관이 가던 유엔대사에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가 임명됐다. 외교 현장에서 뛰어야 할 외교관들이 보직조차 못 받은 사례가 많다. "재외공관장의 역할은 주민자치센터의 동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는 이 대통령 발언에 자괴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외교관들이 재외동포 보호와 영사 업무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까지 새겨들을 여유가 없었다.
물 위의 백조가 우아해 보이는 것은 수면 아래서 쉼 없이 물갈퀴질을 한 덕이다. 국가 간 외교 관계가 잔잔해 보인다면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견을 다독이고 있어서일 게다. 난기류를 만난 지금, 물갈퀴질이 필요한 때다. 외교관이 제대로 일하고 외교가 외교답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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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희준 논설위원 |
● 박희준은
1993년 12월 세계일보에 입사해 32년 9개월간 일했다. 사회부 시경캡, 사건데스크, 사회부장으로 수습기자 교육과 사건 취재를 맡았고 논설위원, 부국장, 편집국장, 편집인을 지냈다. 법조팀장 시절 후배기자들과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로 결말지어진 '박연차 게이트'를 다룬 '노무현은 왜 검찰은 왜'를 펴냈다. 수습기자 교육 경험을 담은 취재와 기사 작성 실무서인 '실무 기자수업'을 2026년 말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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