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관련 57개 제주 단체, "참담한 역사 인식" 안창호 비판
극우 주장에 힘 싣는 듯한 태도 취한 인권위원장 우려스러워
지난달 29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국가인권위원회 국정 감사장.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의원이 "(2003년에 발간된) 정부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북한군 또는 김일성이 관여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보고서에는 없지만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역사적인 고증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3이 북한 공산당이 관여한 공산 폭동이냐"고 김 의원이 다시 물었다. 안 위원장은 "그런 부분은 조사한 바도 없고 구체적인 내용도 모른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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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열린 국정 감사에서 의원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
안 위원장의 4·3사건 관련 발언은 세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첫째, "극우 유튜버 수준의 참담한 역사 인식"(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57개 단체, 지난달 30일 성명)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극우 쪽에서 제기하는 '김일성의 4·3 지령설'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4·3사건에서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과 유족을 폄훼하는 데 오랫동안 악용된 위험한 주장이기도 하다.
"4·3사건이 김일성 지시로 촉발됐다"고 2023년 강변한 국민의힘 태영호 전 의원 경우도 그러한 폄훼 사례 중 하나다. 태 전 의원은 4·3사건 유족이 제기한 소송 1심에서 지난해 패소했다. 법원은 태 전 의원이 허위 사실을 적시해 역사를 왜곡하고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안 위원장은 '김일성의 4·3 지령설'과 명확히 선을 긋기는커녕,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역사적인 고증은 필요하다"며 은근슬쩍 극우 주장에 힘을 싣는 듯한 태도를 취한 셈이다. "태영호 전 국회의원의 수준을 이어가는 극우 세력의 인식에 불과하다"(57개 단체 성명)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인권위원장이라는 점은 참담함을 더한다.
둘째, 법조인에게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라는 것이다. 안 위원장은 서울고검장,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을 지낸 고위 법조인 출신이다.
법조인은 사실을 바탕으로 치밀한 논리를 펴야 마땅하다. 실제로는 이에 못 미치는 법조인이 적지 않지만, 정치적 성향을 떠나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법조인의 본령이다.
안 위원장은 4·3이 북한이 관여한 공산 폭동인지에 대해 "조사한 바도 없고 구체적인 내용도 모른다"면서도, '김일성의 4·3 지령설'에 대해 "좀 더 역사적인 고증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사하지도 않고 내용도 모르는 사안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자세와 거리가 멀다.
셋째,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닥터 X' 사례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닥터 X'는 근래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가 극우 성향 누리꾼 등에게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정치적 논쟁이 있는 5·18을 뜬금없이" 활용한 "좌파 드라마"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주연 배우 김지원의 SNS에 도를 넘는 악성 댓글을 대거 달고, 김지원이 출연한 광고 제품 불매를 주장했다. 방영 중단을 요구하는 국회 청원도 제기했다.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국가 폭력 문제에 대한 성찰이 못마땅한 이들, 즉 당시 가해 세력 및 오늘날의 극우 세력의 움직임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발 중 일부를 살펴보면 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있다.
우선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 '5·18이 아픈 역사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같은 문구를 통해 자신들이 극우는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런 다음 이 드라마에서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를 다룬 부분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몰아세운다.
이러한 태도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간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국가 기관의 조사를 통해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다면 5·18민주화운동과 국가 폭력 문제에 대한 성찰을 '특정한 정치적 입장 대변'이라고 낙인찍을 수 없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 대변'이라는 강변에는 그간 거짓으로 판명된 '5·18 북한군 개입설' 같은 궤변을 퍼뜨리는 일각의 움직임과 연결해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자신들의 궤변은 마치 확인된 역사적 사실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 주장인 것처럼 포장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는 사안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다른 나라 극우 세력도 보인 행태다.
4·3사건과 관련해 극우 쪽에서 근거 없는 '김일성 지령설' 등을 계속 퍼뜨리면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부정하는 맥락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그런 움직임과 명확히 선을 긋기는커녕 극우 주장에 무게를 싣는 듯한 모습을 보인 안 위원장 모습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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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련 기자 |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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