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없는 '삼성 백혈병' 이야기…김지숙 씨의 외로운 싸움

오다인 / 2019-07-08 16:14:28
"하도급 일감에 맹독금속…동생 백혈병 사망"
"책임자 처벌하라"…서초사옥 3년째 1인 시위

1992년 부산 금정구 부곡동에는 부업 바람이 불었다. 동전만 한 금속 2개를 용접하는 일이었다. 돈은 작업량에 따라 지급됐다. 하나당 3원쯤 쳐줬다. 열심히 하면 한 달에 100만 원은 벌었다. 여자들은 더 많은 물량을 바랐다.

김지숙(당시 34세) 씨도 마찬가지였다. 동생 지은(당시 31세) 씨를 위해서였다. 지은 씨는 겁이 많았다. 대학을 나온 후 부모도 지은 씨의 취업을 반대했다. 집에만 있는 지은 씨를 위해 지숙 씨는 마침 동네에 유행하던 부업거리를 받아왔다. 지숙 씨는 낮엔 금융회사에 다녔고 나머지 시간엔 지은 씨와 집에서 용접 부업을 했다. 일은 재미있었다. 자매는 때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일감은 삼성전관(현 삼성SDI)의 하도급 업체인 상일전자가 줬다. 상일전자 사무실은 지숙 씨가 살던 반도맨션 앞길에 있었다. 상일전자는 용접 부업을 하겠다는 집 안에 소형 스포트 용접기(전지의 단자를 용접하는 기계)를 설치해줬다. 지숙 씨네 집 책상에도 용접기가 설치됐다. 발판을 밟아가며 하나씩 붙일 때마다 '딱딱딱' 소리가 났다. 열처리 과정에서 연기도 났다. 냄새는 역하지 않았다. '구수한' 냄새였다.

부업 하던 여자들이 한번은 연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몸에 안 좋은 건 아니겠지?" 누군가 말했다. "삼성 같은 회사가 주부들한테 위험한 걸 주겠어?" 그게 다였다. 반도맨션, 부광맨션을 포함한 부곡동 일대의 70여 가구가 이 부업을 이어갔다. 당시 물량을 날라주고 급여도 전해주던 운전기사가 '누구네 집이 1등'이라고 말하면서 나온 숫자다. 지숙 씨와 지은 씨는 1996년 상일전자가 집집이 설치된 스포트 용접기를 수거해갈 때까지 5년간 용접 부업을 했다.


▲ 삼성전관(현 삼성SDI)의 하도급 업체인 상일전자에서 용접 부업을 하다 얻은 백혈병으로 인해 동생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김지숙(61) 씨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삼성전관의 성장과 이면

여자들의 가내공업으로 만들어진 금속물은 삼성전관의 브라운관 TV(CRT)에 들어가는 전자총 부품 중 하나였다. 전자총은 고체 내 전자를 방출시켜 전자선을 쏘는 디스플레이 장치다. 이 시기 삼성전관은 브라운관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1980년 컬러브라운관 판매를 시작한 지 13년 만인 1993년 누적 판매량 1억 개를 돌파하면서 세계 최대의 브라운관 제조업체로 떠올랐다(한겨레신문 1993년 10월 23일 보도). 말레이시아·독일 공장은 가동 1~2년 만에 흑자를 기록해(매일경제신문 1995년 5월 9일 보도) 멕시코·브라질·중국 등지에 공장이 증설되거나 신설됐다. 가히 '삼성전관이 세계를 뚫는 폭발적 성장을 이뤘다'(한국일보 1996년 7월 15일 보도)고 할 만한 시기였다.

지숙 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건 2005년이었다. 생리가 멈추지 않아 산부인과에 갔더니 "피가 이상하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의사는 백혈병이라고 했다. 믿기 어려웠다. 지숙 씨 집안에 백혈병을 비롯한 혈액암 내력은 없었다.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백혈병이라고 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 정확한 병명이었다. 지숙 씨는 동아대병원에 입원했다.

항암치료를 받은 후 지숙 씨의 건강은 점차 회복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은 씨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리가 멈추지 않았던 지숙 씨와 달리 지은 씨는 생리가 끊겼다. 기침이 멎지 않는데도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는 지은 씨를 지숙 씨가 병원에 억지로 데리고 갔다. 의사는 지은 씨에게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2010년 10월,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지은 씨는 세상을 떠났다.

지숙 씨가 과거 자신과 동생이 집에서 했던 용접 부업이 백혈병의 원인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된 건 이보다 6년이나 지나서였다. 지은 씨가 사망하고 지숙 씨는 공황장애를 비롯한 정신적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평생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남다른 자매였다. 어머니 병간호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쓰러졌다. 뉴스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2015년 5년간의 와병 끝에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고 지숙 씨는 우연히 뉴스를 접했다. 백혈병을 둘러싼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간 논란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과거 자신이 했던 부업과 삼성이라는 회사. '납땜', '용접' 같은 키워드를 넣고 검색을 해봤다. 알아볼수록 의심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지숙 씨는 2016년 5월 반올림 카페에 가입해 자신의 근로와 발병 사실을 제보한 후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해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오고 있다. 삼성SDI가 아닌 삼성전자 사옥에서 시위하는 건 앞서 삼성SDI 울산공장에서 시위하던 때 삼성SDI 측 관계자가 지숙 씨에게 "(산재 인정과 피해 보상은)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의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문재원 기자]


부업 가구 중 백혈병 사망자 추가 제보

지숙 씨는 어느 날엔 삼성SDI 직원을 붙잡고 "전자총 부품에는 어떤 물질이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니켈합금"이라고 했다. 지숙 씨는 니켈합금을 열처리하는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발생해 자신과 동생이 백혈병에 걸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니켈은 백혈병 유발과의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발암물질로 알려져 있다.

지숙 씨와 같은 용접 부업을 한 가구 가운데 백혈병 사망자는 더 나왔다. 부곡동 부업 가구 70여 곳 중 지숙 씨가 파악한 사망자만 4명이다. 지숙 씨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사례를 알리면서 부곡동에서 같은 부업을 한 후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례들이 모인 것이다. 부곡동 부광맨션의 한 가구에서는 어머니와 딸이 모두 백혈병과 암으로 사망했다. 모녀가 부업을 하던 때 이 집에 들른 친척 감모 씨는 "반찬값이라도 하려고 부업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후 모녀가 느닷없이 백혈병과 암으로 세상을 떠난 데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감 씨가 지숙 씨 사연을 접하고 알려왔다.

지숙 씨의 사례를 접한 이가 어머니의 사례를 반올림에 제보한 일도 있었다. 어머니 한모 씨가 지숙 씨와 같은 용접 부업을 했고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지숙 씨는 "당시 부업으로 인해 병을 얻고도 아직 원인을 모르는 피해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남아 있는 과제와 지숙 씨의 호소

지숙 씨가 원하는 건 자신과 지은 씨의 백혈병 발병에 관한 삼성 측의 사과와 보상, 그리고 책임자 처벌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지숙 씨는 '삼성 백혈병' 사태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로 책임자를 가려내는 일이 삼성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던 피해자보다 까다롭다고 말한다. 상황이 녹록하지 않지만, 지숙 씨는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하는 등 일말의 희망을 붙들고 있다.

이종란 반올림 노무사는 "삼성SDI (직업병) 피해는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다"면서 "지숙 씨 사례뿐만 아니라 삼성SDI 울산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박진혁(사망 당시 28세) 씨 같은 피해자가 있으므로 삼성SDI 관련 피해도 향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 박진혁 씨는 삼성SDI 울산공장의 사내 하도급 업체 소속으로 근무하던 중 별안간 백혈병을 얻어 2005년 사망했다. 아버지 박형집 씨는 지숙 씨처럼 5년이 흐른 2010년 반올림에 관한 소식을 접한 후에야 아들의 사망 원인을 삼성의 산재로 의심하게 됐다. 이 밖에도 같은 공장에서 일하다 비인강암 진단을 받은 김송희 씨도 있다.

▲ 2010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김지은(오른쪽, 사망 당시 49세) 씨의 어릴 적 모습. [김지숙 씨 제공]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에 대한 건강실태 역학조사를 수행했던 김은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직원건강연구실 조사책임자는 "당시 작업과 백혈병 간 직접적인 연결성을 입증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최근 법원의 판결 동향으로 보면 명백히 (인과관계가) 입증이 안 되더라도 개연성에 비춰 보상 판결하는 때도 많다"고 말했다.

지숙 씨의 주장에 관해 삼성SDI 측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사실관계 파악이 어렵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숙 씨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과와 보상도 중요하지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일을 시킨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까지 이뤄져야 합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죠."

지숙 씨는 지은 씨의 사망과 함께 얻은 공황장애를 아직 앓아오고 있다. 벌써 9년째 정신과에서 공황장애와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삼성 백혈병' 사태에서 삼성전자 소속을 제외한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테크윈(현 한화테크윈), 삼성SDS 등 나머지 계열사와 하도급 소속 피해자에 대해서는 현재 조정위원회도 꾸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와 반올림 간 조정·권고안이 극적으로 타결되면서 언론에는 '삼성 백혈병 마침표'라는 제목의 기사가 쏟아졌다. 아직 마침표는 찍히지 않았다.


KPI뉴스 / 오다인 기자 odi@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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