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 진실화해위, 국가의 사과 및 재심 등 화해 위한 조치 권고
창명2호는 1968년 4~8월 동해서 납북된 어선 12척 중 하나
귀환 후 불법 구금, 가혹 행위, 지속적 감시·사찰 등에 시달려
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20일 오후 창명2호 납북 귀환 어부인 고(故) 전모 씨의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피해 인정) 확인 결정을 내렸다.
2월에 출범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한 3기 진실화해위에서 처음으로 내린 진실 규명 결정이다. 3기 진실화해위는 고 전모 씨가 겪은 인권 침해에 대해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및 명예 회복을 위한 재심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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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실화해위 송상교 위원장이 20일 오후 제7차 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제공] |
창명2호는 박정희 정권 시기인 1968년 7월 2일 동해에서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 피랍 당시 16명이 타고 있었다. 창명2호는 그해 4월 27일부터 8월 7일까지 동해에서 납북된 어선 12척(선원 총 167명 탑승) 중 하나였다.
납북된 이들은 몇 달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다가 풀려나 같은 해 10월 31일부터 11월 28일까지 남한으로 귀환했다. 모두 돌아오지는 못했다. 어선 9척과 선원 107명만 다시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창명2호의 경우 16명 중 11명만 귀환했다.
돌아온 107명은 불법적 수사를 받았다. 그런 상태에서 작성된 서류 등을 근거로 대다수에게 징역형이 선고되거나 징역형 집행 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그 이후에도 납북 귀환 어부 본인은 물론 가족과 친인척까지 수사·정보기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인권 침해를 당해야 했다.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3월 직권 조사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107명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했다. 그 가운데 창명2호 납북 귀환 어부인 고 전모 씨 측의 신청이 3기 진실화해위 출범 후 접수됐고, 그에 대해 20일 3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 규명 확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여러 매체에서 이 진실 규명 확인 결정에 대한 기사를 냈다. 하지만 대다수가 창명2호 피랍·귀환 시기, 107명에 대한 2기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 결정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갔다. 지난해 2기 진실화해위가 발간한 조사보고서에 담긴 창명2호 선원과 그 가족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들어보자.
107명은 1968년 귀환 직후 최소 8일에서 최대 36일 동안 영장 없이 불법 구금됐다. 그런 상태에서 가혹 행위를 당하는 등 불법적 수사에 시달렸다.
경찰 조사를 받을 때 상황에 대해 창명2호 선원 여모 씨의 아내는 "경찰서 2층에 선원들을 세워놓고 경찰들이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원 최모 씨는 "경찰에게 '우리 배가 월선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경찰들은 우리가 북으로 넘어간 것이니 검찰이나 재판에서 '배가 북으로 넘어가 납북된 것이라고 말하라'고 시켰다"고 진술했다. 이와 관련해 2기 진실화해위는 "당시 납북 귀환 어부들이 자의로 월선해 월북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납북 귀환 어부 107명 중 청각장애인 1명을 제외한 106명을 기소했다. 수산업법, 반공업(탈출, 찬양 고무), 국가보안법(금품 수수) 위반 혐의였다(일부에게는 수산업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만 적용). 생계를 위해 바다에서 일하다 북한에 납치된 어부들에게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라는 무시무시한 딱지가 붙었다.
납북 귀환 어부들은 불법적 수사가 이뤄진 경찰 조사 단계나 검찰에서는 대부분 월선 조업을 인정했지만, 재판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고기를 더 많이 잡으려다 일시적으로 어로 저지선을 넘었을 뿐 고의가 아니었다고 호소했다. 월선한 게 아니라 강제로 납치를 당한 것이라고 항변하는 선원들도 있었다.
창명2호 선장과 다수의 선원은 법정에서 "조류 관계로 휴전선을 넘었는지 모르나 처음에는 휴전선 이남에서 어로를 했으며, 북상하는 오징어를 더 많이 잡으려는 욕심에 계속 작업했다"고 말했다.
창명2호 피랍·귀환자 11명 전원을 비롯한 납북 귀환 어부 대다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국가보안법 위반 등 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됨). 창명2호 선원 여모 씨와 최모 씨는 각각 징역 1년, 자격 정지 1년형을 받았다.
최모 씨는 납북됐다가 귀환한 후 집에 가지 못하고 바로 조사를 받았다.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후에야 집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여모 씨도 피랍·귀환 후 곧장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더 비극적이었던 것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모 씨는 전에도 납북된 적이 있었다. 창명2호 피랍은 여모 씨가 두 번째로 겪은 납북 사건이었다. 여모 씨의 아내는 "남편은 평소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출소 뒤 손가락 뼈마디가 튀어나와 있고 몸이 매우 아파 일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납북 귀환 어부들은 형사 처벌을 받은 후에도 수사·정보기관으로부터 지속적인 감시와 사찰을 당했다. 본인은 물론 가족과 친인척도 감시를 받거나 진학과 취업 등 일상생활에 제한을 받는 등 인권 침해를 당했다.
창명2호 선원 최모 씨의 아들은 "아버지가 어딘가에 계실 때 지서에 신고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찾아와 '왜 신고하고 가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는 모습"을 보고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좋은 직장에 가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선원 여모 씨의 자녀는 스무 살 때 외국 여행을 가려 했지만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너는 여권을 만들 수 없다"고 해서 이유를 물어봤지만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너는 여권을 만들 수 없게 돼 있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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