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서포터즈 '천년전주사랑모임' 이종민 상임이사
문화예술의 기본적인 치유의 힘을 믿고 전파해온 삶
"특별히 좋았던 시절 있었나, 희망은 기본적인 태도"
시집 한권을 여럿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일, 쉽지 않다. 낭송회는 많지만, 애송시 중심으로 시인이나 독자들이 몇편 읽는 일이 대부분이다. 시인을 초청해 그의 시집 한 권을 선택, 수록된 시 전편을 모두 소리 내어 읽고, 시인에게 각 시편마다 궁금한 것들을 묻고 설명을 듣는 시집 완독회가 있다. 시인과 함께 시집 한 권을 완독하는 '시집 완주모임'이 전주에서 2년째 열리고 있다. 전주 '문화파수꾼' 이종민(전북대 영문과 명예교수) '천년전주사랑모임' 상임이사가 기획한 많은 문화 행사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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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한권을 끝까지 완독하는 모임을 2년째 이어가고 있는 이종민 '천년전주사랑모임' 상임이사.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김사인 시인을 2021년 전주시에서 제공하는 한옥마을 집필실로 초청하면서 '완독' 모임이 촉발됐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줌으로 진행했고,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시작으로 안도현 박남준 안상학 등으로 이어져 올해 손택수 진은영 이병률 송재학 천수호 시인까지 모두 25명 시집을 완독했다. 참여하는 독자들은 물론이지만 초대받은 시인들이 더 좋아했다. 떠나보낸 시들을 다시 직면해서 꼼꼼히 들여다볼 기회는 사실 드물다. 발표 후 시집으로까지 묶어놓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대면하는 자리가 아닌 이상 다시 돌아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안도현 시인은 "완독했다는 것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제3자의 목소리로 내 시를 읽으니까 이런 저런 점이 잘못됐다는 것이 그냥 확 드러난다"면서 "시를 더 잘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내 시를 다시 보게 됐다"는 소감을 밝혔다고, 이 교수는 전한다.
이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40여년 간 전북대 영문과에서 재직하면서 다양한 기획자로 살아왔다.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전주를 한옥을 매개로 한 문화중심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데 기여했고,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사업을 주창해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보급이 활성화되기 시작할 무렵 이메일을 활용해 이종민의 음악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일도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다. 20여 년 동안 지인 2000여명에게 '이종민의 음악편지' 300여 편을 보내며 소통했고, 음악편지 구독자를 대상으로 2002년 동짓날 시작해 2020년까지 북한 어린이돕기 모금운동을 벌여 1억7000여 만원을 모아 북한 어린이들에게 콩우유 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2021년 정년퇴임 기념으로는 그동안 음악편지를 받았던 이들에게 그들의 인생 음악을 돌아보는 글을 받아 '내 인생의 음악'을 펴냈다. 올해는 시집 완독 모임 외에도 고향인 완주군에서 시인과 음악인들이 1박2일 모여서 노래하는 '시노래 콘서트'를 비롯한 문화 치유학교를 추진하면서 '찾아가는 치유의 인문학'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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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민 교수는 "문화예술 전반은 우리 삶의 내밀하고 근원적인 부분들을 건드려주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더 잘 견딜 수 있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모금을 통해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을 격려하는 '천인갈채상'도 12회째 진행 중이다. '전주 화전놀이' '한시로 읽는 중국역사문화기행' '지금은 우리에게 문학이 필요하다' 등이 모두 올해 그의 기획력으로 이어진 행사들이다. 중견시인을 초청해 대담을 나누는 '한국시 깊이 읽기'도 눈길을 끌었다. 전주가 시인과 작가들이 북적이는 문화 중심도시로 거듭난 한 해가 된 셈이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문화예술의 힘을 키우고 확산시켜나가는 이종민 교수를 전주 한옥마을 카페에서 만났다.
-시집 완주모임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코로나시대가 제공한 의외의 선물인 셈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
"보통 20~30명 정도가 참여해서 3~4시간 정도 진행된다. 참여자들이 낭송하고 싶은 시 3~4편을 미리 신청받아 돌아가면서 낭송하고, 그들이 시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초기에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갈수록 질의 응답이 진지하고 길어져서 이제는 제가 나서서 잘라야 할 정도다. 박남준 시인의 경우는 자료들을 많이 준비해서 완주에 4시간 30분 가량, 가장 길게 소요된 적도 있다. 미국 교포 시인들까지 현지에서 참여해 글로벌 모임이 됐다. 무엇보다 참여하는 시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반응을 보여서 내년에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
-이른바 영상 시대에, 문학을 향유하는 인구들이 변질되거나 사라지는 팍팍한 시대에, 이런 일들을 오랫동안 끊임없이 기획하는 에너지가 놀랍다.
"'시는 삶을 견딜만하게 해 준다'는 영국 시인 매슈 아널드(1822~1888)의 말을 자주 인용하는데, 시가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비전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삶의 어떤 궁극적인 모습들을 보여줄 수는 있다. 인문학, 문화예술 전반이 보통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우리 삶의 내밀하고 근원적인 어떤 부분들을 건드려주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더 잘 견딜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문화예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치유력이다. 요즘 시를 안 읽는다고 얘기하는데, 예전에는 많이 읽었나. 그때도 소수가 읽었다. 지금은 오히려 문맹률이 많이 떨어지면서 대중 독자들이 확보됐는데 그 중에서 시 읽는 사람이 좀 적다고 하는 거다. 시는 언제나 소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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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한옥마을의 기반을 다진 문화 기획자 이종민 교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문화예술이 지닌 치유력을 인정하지만 앞장서서 그 힘을 키우고 전파시키는 환경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내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허영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외국문학도가 사실 사회에 뭔가 기여를 한다는 건 쉽지 않다. 전공보다 제가 갖고 있는 기획력이나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훨씬 주변에 더 선한 영향력을 더 끼칠 수 있겠다 싶었다."
'백발이 성성한데 철이 덜 든 소년 같다. 동학백주년기념사업과 전주 한옥마을의 기반을 다진 문화기획자다. …그이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걸 좋아하고 그 사람들을 어울리게 하는 문화의 힘을 신뢰한다. 그렇게 생성된 힘을 세상에 돌려주고 종내는 멀찍이 물러앉아 고요히 즐기는 사람이다.'
-정년퇴임 기념문집 '내 인생의 음악편지' 뒤에 붙인 안도현 시인의 헌사다. '철든 소년'을 유지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설렘의 기다림이 없다면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아무런 기약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꼴이다. 정년퇴임 후 고향 텃밭에 매실나무를 심은 것도, 모금운동을 전개한 것도, 설레는 기다림을 위한 것이다. 마이클 호페의 '기다림'이라는 노래로 음악편지를 쓴 적도 있다. 기다릴 거리가 많은 삶이 아름답고 풍요롭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야말로 기다림이다. 기다릴 거리를 만드는 것, 제 인생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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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민 교수는 고향 마을 매실밭 머리에서 노모와 함께 지내며 틈틈이 시내에 나와 문화 기획을 추진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문화예술 보조금이 삭감되면서 어려움을 겪는 곳이 많다.
"문화예술은 특히 정책이 바뀌면 쉽게 외면당한다. 그래서 일찍이 문화예술 시민 서포터즈 개념의 '천년전주사랑모임'을 출범시켰다. 전통문화중심도시를 만들기 위한 초기 단계의 노력에서 점차 문화예술 쪽으로 확장시켰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희망은 세계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보다 마음의 상태'이다.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당연히 갖춰야 할 태도이기 때문에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희망을 포기하면 절망이고, 절망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절망과 희망은 상반된 것이 아니다."
치매로 불편한 97세 노모를 모시고 완주 화산 매실밭 머리에서 끊임없이 '기다릴 것'을 만들어내고, 틈틈이 시내에 나와 추진을 하는 철든 소년. 영시 명시를 선별해 펴낸 '불멸의 새와 꽃의 영광을 노래하라'에서 그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호랑이'(The Tyger)에 자신이 살아온 신념을 투사한다. 변혁을 꿈꾸며 타협하지 않는 태도, 그것은 쉽게 흉내내기 힘든 '무서운 균형'이다.
'호랑아, 어둠의 숲에서/ 이글이글 불타는 호랑아/ 어떤 불멸의 손 아니 눈이/ 너의 무서운 균형을 빚어낼 수 있었을까?// 어느 머나먼 심연 혹은 하늘에서/ 너의 두 눈의 불이 타고 있었을까?/ 어떤 날개로 그가 감히 날아오를까?/ 어떤 손이 감히 그 불을 움켜쥐는가?' _'호랑이'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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