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마다 '피크 기간' 존재...정신적 문제도"
"무언의 압박으로 추가 근로 강요받게 될 것"
정부 "융통성 있는 제도, 굉장히 절박한 상황"
"3개월간 지속된 야근 끝에, 사흘 연속 밤을 새운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심장이 엇박자로 뛰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순간이었습니다."
2012년 입사해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개발 직군에서 근무 중인 한기박씨의 증언이다. 국회에서 반도체특별법 처리가 주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 여부를 놓고 난항 중인 가운데 일부 당사자가 직접 겪은 고충과 반대 의견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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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 특별법 폐기와 노동시간 연장 시도 중단을 촉구하는 노동·시민단체들의 기자회견이 지난 10일 국회 정문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
노동계와 시민단체, 진보정당들이 지난 10일 구성한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과 참여연대,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 무소속 김종민 의원이 13일 국회에서 공동 개최한 토론회 자리에서였다.
한씨는 "연구개발 직군은 매년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이상 그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면서 "'피크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이 수 일로 끝날지, 6개월 이상 이어질지는 프로젝트가 끝나야만 알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찔한 위험의 순간들을 겪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신적 문제까지 야기됐었다고 한다. 한씨는 "야근 중 여자 선배가 화장실을 가다가 쓰러졌다. 곧바로 달려가 의식을 확인하고 119에 신고하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서 "업무에 쫓기며 몽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라보기만 했을 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지금까지도 그 순간 저의 행동이 충격과 후회로 남아 있다. 과로가 단순히 건강을 해치는 것을 넘어,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력마저 마비시킨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했다.
힘들어도 이직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한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봉 계약 시 '이직하지 않겠다, 창업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퇴사할 때도 마찬가지"라며 "마지막 서약서를 받았을 때는 다른 반도체 기업들의 이름이 명시돼 있었다. 해외 기업으로 이직하면 '국가 핵심 기술을 유출한 매국노'로 매도당하며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분위기까지 조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반도체특별법으로 주52시간제 예외 허용이 법제화된다면 노동자 의사와 무관하게 강요받게 될 것이란 의견도 제시됐다. 여당 법안은 당사자 간 서면합의를 전제로 하지만 허울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14년째 삼성전자 연구개발직군에서 일하고 있는 변희범씨는 "수많은 리더의 고과 평가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 아래 일하고 있다"면서 "지금도 법의 범위 내에서 연장 근로를 감내하는 동료들이 존재하는데, 만약 노동시간 유연화가 정식으로 허용된다면 그 제도는 부서 분위기와 부서장의 평가를 무기로 한 무언의 압박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추가적인 근로를 강요받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법안은 연구개발직에 한해 52시간제 예외를 담고 있지만, 실제 적용되는 과정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반도체 후공정 업체에서 28년째 일하고 있다는 한 노동자는 "노조가 없는 수도권의 공장과 조합원이 없는 지방공장 제조팀은 'R&D센터 테스트연구부서'라고 이름을 바꿨다"면서 "소속 오퍼레이터(생산직)에게 '연구원 지원보조'라는 이름으로 근무를 시키고 주5일 중 5일을 잔업해도 생산물량을 맞춰야 한다며 휴무일에 특근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1차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역시 건강이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가 함께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주당 55시간 이상 근무할 경우 허혈성 심장질환과 뇌졸중 위험이 각각 17%, 35% 증가한다.
연구개발직 등 고소득 전문직도 장시간 노동이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몰아서 일하기 같은 불규칙한 노동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본다.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바짝 일하고 쉴 수 있다 하더라도 '바짝 일하는' 동안 과로한다는 사실, 그로 인한 건강 영향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주52시간제 예외 적용과 관련해 "반도체특별법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고 52시간 예외에 대해서도 융통성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지금 굉장히 절박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10일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첨단기술 분야에서 장시간 노동, 노동 착취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말은 그 자체가 형용모순"이라고 밝혔다.
KPI뉴스 / 박철응 기자 hero@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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