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소환해 현재를 살려내는 '열망' 사용법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가 매개한 삶의 동력
"현재와 접목할 때 과거의 추억도 빛난다"
가슴속을 잘 들여다보시라. 아직 열망이 남아 있는지, 그 불씨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잘 뒤적거려 보시라. 타고 남은 재만 풀썩거린다고 해도 잘 헤집어보면 아직 살릴만한 불씨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 않는가. 애써 입김을 불어넣으면 희미하게라도 다시 뜨거워질 오래전 열망을, 그 추억을 만질 수 있다면 과거의 것으로 묻어만 두지 말고 지금 이곳의 누추한 삶과 다시 접목시켜보는 건 어떠할까. 맹목으로 뜨거웠던 지난시절 열정만큼은 아니더라도 살아온 만큼 쌓인 회한과 남루를 조금이라도 잊게 만들 새로운 동력을 확보할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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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장편 '디어 마이 송골매'를 펴낸 이경란. 등단 전부터 첫 습작 소설로 시작한 '송골매'를 붙들고 12년 동안 개작을 거듭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소설가 이경란이 최근 펴낸 신작 장편 ‘디어 마이 송골매’(교유서가)는 이 과정을 촉발하는 길잡이로 유용하다. 청소년기에 열광했던 록 밴드가 38년 만에 재결합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당시 뜨거웠던 마음을 되새겨보면서 잊혀진 친구들을 만나 콘서트 현장을 찾는 이야기다. 이 밴드란 표제 그대로 배철수 구창모가 중심인 ‘송골매’를 이르거니와, 이경란은 실제로 그들의 ‘덕후’로 살았다.
소설에서는 홍희, 은수, 미호, 기민, 이들 네 인물이 송골매를 고리로 뭉쳤던 친구로 등장한다. 이들 모두 현실에서는 50대 후반에 접어든, 열망은커녕 딱히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식은 재 같은 삶을 뒤적거리는 존재들이다. 홍희는 아들 마루와 함께 '식당 아줌마'로 살고 있고, 은수는 IT회사에서 승승장구하지만 치명적인 암이 발견됐고, 미호는 중산층 전업주부인데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희미한 존재이고, 그나마 귀여운 아내로 살아온 기민은 ‘빈 오선지’ 같은 존재로 무언가 채워 넣을 연료가 갈급한 캐릭터다.
홍희는 미호의 분별없는 말에 상처 입어 그네를 안 본 지 오래 됐고, 은수나 기민과도 연락이 두절된 채 살아가지만 송골매의 재결합 소식은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욕구를 발동시킨다. 재결합 콘서트 D-100부터 시작해 공연 날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마지막 공연장까지 빠르게 이끄는 흡인력을 발휘한다. 어깨에 힘을 주지 않고 술술 읽히는 문체로 경쾌하게 이끌어가는 배려 덕분이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정작 12년이나 걸렸다고 이경란은 말한다.
“처음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2011년이었어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태였는데 이대로 이렇게 늙어서 그냥 죽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러지 말고 뭔가 내가 좋아하는 거를 해보자 싶었고, 자본도 들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소설을 써보겠다는 마음으로 송골매를 붙잡은 거죠. 우연히 TV 토크쇼에서 배철수 씨가 자신은 53년생인데 전쟁통에도 사랑이 있었다고, 젊은이 여러분 사랑하세요, 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이 순식간에 추억으로 데려간 거죠.”

첫 습작 소설부터 송골매였고,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장편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까지 내면서도 송골매는 단편에서 중편으로, 중편에서 장편으로 개작을 거듭했다. 그러다 소설 속 구상처럼 정작 현실에서 송골매가 재결합 콘서트를 발표해버리니 마음이 급해져 마무리를 짓게 됐고, 그 결실이 재결합 콘서트 1주년에 맞춰 힘들게 빛을 보았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어디로든 발산할 에너지가 가득하던 시기에 다가오는 스타들은 각 세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경란의 경우는 ‘송골매’였지만, 딸 세대는 ‘지오디’나 ‘동방신기’일 수 있고 그 전전 세대에게는 ‘나훈아’나 ‘남인수’일 터이다. 따지고 보면 ‘송골매’는 특정 스타 그룹이기 앞서 추억의 불씨를 점화하는 상징으로서 의미가 깊은 셈이다.
“연애할 때 보면, 지구상 절반이 남자인데 왜 하필 이 남자랑 연애를 하냐면 이 남자가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어떤 시간적인 우연성, 공간적인 우연성, 이런 거가 겹치고 또 많은 사람 중에서 이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거는 뭔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순간적인 감정 같은 것이 개입하는 거잖아요. 그런 거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이경란의 ‘덕질’은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실린 송골매 2집이 나오던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젊음의 행진’ ‘영일레븐’ 같은 TV 프로그램에 빠져 있다가 애국가가 나오면서 방송이 종료되면 다시 라디오를 붙들고 잠을 쉬 이루지 못하던 때였다. 강렬하고 간절하게 무언가로 채워지기를 갈망하던 시절, 그 빈 공간을 채우는 행위가 ‘덕질’로 이어지는 것인데 여기에 ‘취향’이 결부돼서 사람마다 그 양상이 달라지는 것 같다고 이경란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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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란은 '덕질'의 추억을 생의 2단계 로켓 연료로 충실하게 활용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송골매 그룹 멤버들이 결별했을 때 작가와 닮은 소설 속 홍희는 무지하게 울었다. ‘그전에 배철수가 생방송 도중 감전되어 쓰러졌을 때도 펑펑 울었다. 그때는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울음이었고, 결별 때는 세상이 끝장난 듯한 허망함과 서러움의 울음이었다. 소식을 들은 날, 학교 벤치에 앉아 훌쩍거리다가 엉엉 통곡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내내 흐느꼈다. 흐느끼면서도 더욱 마음껏 흐느끼고 싶어서 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갔다.’
수업시간에 ‘TV가이드’를 책상 밑에 펼쳐놓고 송골매 인터뷰와 사진을 보던 ‘기민’은 총각 선생 ‘상욱’에게 걸려 앞으로 불려나간다. 출석부로 기민의 정수리를 내리치며 ‘송골매 그 날라리들이 이차방정식이라도 풀어준대냐?’는 상욱의 말에 흐느끼면서 항의하던 기민의 말. '저더러 뭐라 하시는 건 괜찮은데요. …근데 송골매를 모욕하지는 마세요.' 통곡하던 제자 기민과 후일 결혼한 상욱 부부는 이번 소설 4인의 친구들 중 가장 귀엽게 알콩달콩 살아내는 인물들인데, 기민은 40년 동안 기다린 재결합 콘서트 때문에 결혼 30주년 크루즈 여행을 포기하며 상욱과 다투고 가출한다. 어이없어 하는 상욱에게 기민이 하는 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실 수십년 세월의 탁류 속을 흘러오다 보면 기민의 경우처럼 '사랑'이 온전히 보존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시절의 열망을 단순히 추억으로 소비하고 넘기느냐, 아니면 지금 현재 곤고한 삶의 새로운 연료로 활용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이경란은 추억을 소설에 접목시켜 생의 2단계 로켓 연료로 충실하게 활용한 경우다.
“열망을 끌어올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옛날에 저보다 더 좋아했던 사람도 있겠죠. 문제는 지금 다시 그 마음을 불러내서 현재화할 수 있느냐인데, 저에겐 그럴 힘이 있었다는 점이 좀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그런 마음이죠. 처음 습작을 썼을 때는 희망이 없는 인생이라는 절망적인 느낌이 컸는데 소설을 쓰면서 차츰 극복해온 것 같아요. 인물들에 대한 시선도 많이 달라졌어요. 소설이 큰 동력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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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란은 "수없이 고쳐 쓰고 다시 꺼내 매만지는 이야기가 지긋지긋하면서도 황홀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지난해 열린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에 방해받지 않고 충분히 느끼기 위해 홀로, 이틀 연속 참석했다는 이경란은 소설의 엔딩 장면에 이르러 ‘폭발하는 함성과 함께 일제히 일어선 관객들의 떼창’을 전하면서, ‘그것은 노래였고, 기도였고, 축복이었으며, 그대로 그들 모두의 삶이었다’고 썼다.
“콘서트 현장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저처럼 혼자 온 사람들도 꽤 많았고 부부동반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 저하고 비슷한 마음으로 왔을 것 같아요. 이들이 그동안 살아온 곡절들은 모두 다를 테지만 충만감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충만감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고, 그 공간에서는 모든 게 용서되고 친구가 될 것 같더군요. 사람들이 많이 울었는데 저도 마스크가 다 젖었어요.”
‘송골매’ 같은 추억을 비축하지 못한 이들의 쓸쓸함은 어찌할까. 이경란은 “중요한 건 추억이 아니라 현재”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름대로 추억도 중요하지만 추억은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연료인 것”이라면서 “현재와 접목할 때 과거도 다 빛이 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잿더미 속 불씨를 살려 현재를 사르는 이경란의 말.
“저는 모든 소설을 사실 저 좋으라고 써요. 특히 이 소설은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쓰면서 제가 이미 다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누렸기 때문에 저에게 의미가 큰 소설이고, 독자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보람이 더 있겠죠, 고맙고.”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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