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열의 AI경제] AI시대의 귀중한 자원 '다정(多情)함'

KPI뉴스 / 2025-07-10 11:37:11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의 시조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면 당신도 오래된 교과서를 봤을 확률이 높다. 주군을 향한 일편단심 어쩌구 해설이 많지만 요지는 생각이 너무 많아 잠이 잘 오질 않는다는 하소연이다. 다정(多情)은 정이 많다는 뜻이다. 정이 많아 병이 될 정도면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나 노이로제쯤 될 것이다. 전에는 병증(病症) 수준의 다정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이 짙었다. 감정과잉 내지 지나친 오지랖이라고 낮추어본 것이다. 그런데 다정의 전성시대가 왔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는 다정해야 살아남고, 팔리고 먹힌다. 

 

▲ 인간과 AI가 포옹하는 이미지. 다정하게 웃는 여성의 표정과 AI의 무표정이 대비된다. [챗GPT 생성]

 

다정은 왜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됐을까. 

 

첫째, 미래를 살아야 할 MZ세대가 너무 팍팍한 현실에 질려 섬세하게 신경써주는 다정함의 가치를 높이 보기 시작해서라는 주장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슈가 되었지만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세대차는 주로 경제적인 빈부격차에서 나온다. 연평균 성장률 8%대를 살아온 고도성장 세대는 열심히만 일하면 결혼하고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당연하게 가능했다. 

 

그러나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서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한국은 이제 저속성장, 가속노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참 일할 생산 가능인구는 주는 반면, 부양대상인 조기은퇴 실버세대는 늘었다. 집도 결혼도 취업도 포기한 3포 세대는 비정규직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미래의 희망을 갖기 힘들다. 그래서 "나 때는"하는 꼰대의 훈계보다 "너 힘들지"라고 격려와 공감을 해주는 멘토의 다정함을 선호한다.

만약 MZ세대에게 투표나 구매를 독려하고자 한다면 매우 감성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렇기 때문에' 식의 T형 3단 논리는 덜 먹힌다. 그들의 긴급한 관심사에 공명하고 올라타야 한다. 이것조차도 시장 논리라면 더 원초적인 해석도 있다. 

 

물적 풍요에 넘치는 선진국에서 태어나 소비의 물신에 누구보다 통달한 젊은이들은 반대로 아주 작고 구체적인 개인의 체험에 큰 점수를 매긴다. 풍부한 상품은 낮게 보고, 희귀한 마음 씀씀이를 높게 치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록밴드 음악이 10, 20대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도 그것이다. 우리보다 개인화한 사소설류(流)의 섬세한 감정이 깨알 같은 표현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아마 그 일본식 다정함이 한국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리라.

둘째, 사회 전체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면서 타인을 위한 배려, 희생, 봉사, 헌신 등이 고귀한 태도로 받들어지는 다정함의 계몽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의 갈라진 진입로나 지하철의 입구 대기 줄에서 새치기하는 모습은 이제 매우 희귀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양보하는 게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는 약한 징표로서 꺼려졌었다. 전쟁을 살아온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 이어 혁명과 투쟁으로 청춘을 바친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남을 밀치고라도 앞으로 나서야 한다고 배웠다. 가끔 공중질서를 지키지 않고 고성방가를 하거나 점프하듯 빈 좌석에 돌진하는 흰머리들이 보인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먼저 치지 않으면 영영 밀린다, 우물쭈물하다가 물 먹는다,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서도 악착같이 앞줄에 서고 작은 혜택도 남김없이 싹쓸이하려는 습성이 배겨 아들딸 세대와 갈등을 빚는다. "엄마 창피해, 아빠 무식해" 소리까지 듣는다. 후진국의 용사가 선진국의 천사에게 야단을 맞는 건 필연이다. 

 

셋째, 인공지능(AI) 만능의 과학 시대에 다정함이 유일한 인간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탄생한 근대 AI는 불과 70여 년 만에 프로그래머와 초보 법률가의 일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발전했다. 인간의 지성을 모방하기 위해 뇌를 연구하다가 이제 반도체와 소프트웨어의 연산이 뉴런과 시냅스에 맞먹을 정도로 커졌다. 일부 제한된 정신활동에서 사람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몇 년 내로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범용 인공지능(AGI) 또는 초지능(ASI)이 출현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마저 나왔다. 

 

이런 과학 만능시대에 인간은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야 할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모 세대도, 미래를 살아야 할 자식 세대도 정답이 없다. 피지컬 AI로 육체노동마저 자동화될 조짐을 보이자 요리사, 헤어디자이너처럼 안드로이드 로봇이 따라 하기 힘든 복잡한 블루칼라 직업을 가지라고 권유하는 정도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인간만이 가진 감정이 힘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계는 논리연산만 잘 할뿐, 웃고 울고 화내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 인간사회는 이성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주식시장이 컴퓨터의 수학적 분석으로만 해석 가능하다면 일찌감치 퀀트(quant) 전문가들이 점령했을 것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가까운 실전형 대학인 스탠포드의 인공지능 연구소 명칭이 HAI(인간중심 인공지능)이다. 인간이 더 친숙하게, 편안하게 쓸 수 있는 기술이 목표다. 다정해야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낀다. 실리콘 반도체의 모래처럼 까칠한 작동과 현기증 나는 빛의 속도로 돌아가는 연산의 냉기 속에서 사람은 인간적인 체온을 원하게 마련이다. 따스한 그 무엇, 고향의 아랫목이나 어머니의 품안처럼 다정한 원초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바로 다정함의 기원이다.

산업사회에서 버려야할 구습처럼 여겨지던 다정한 마음 씀씀이가 인공지능 사회의 가장 귀중한 감정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다정한 기계가 나올 때까지 인간은 서로에게 더 다정해질 수 있다.

 

▲ 노성열 논설위원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5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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