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문학이 뭐야? 바로 사랑이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4-02-16 15:48:42
'중국의 카프카' 찬쉐 장편소설 '격정세계'
삶의 수수께끼를 함께 풀고 행복을 구하는
지극한 사랑의 체험으로 흐느끼게 만드는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랑하는 이들의 '판타지'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초대하지 않았는데 찾아온 손님처럼 문장들이 머릿속에 나타났다. 어제의 경지를 이어받아 계속 써 내려갔고 재치 있는 말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가 전혀 없이 단어와 문장이 머릿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손에 쥔 펜을 움직이기만 하면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정확하고 노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글쓰기를 갈망하지 않는 이가 뉘 있을까. 자리에 앉자 마자 줄줄이 쏟아지는 옹골찬 문장들, 손님처럼 줄기차게 방문하는 재치 있는 말들, 단어와 문장이 줄을 서서 손가락을 움직이기만 하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경지. 과연 이런 황홀경이 가능한 것일까. 현실에선 불가능할지 모르나 최근 국내에 소개된 찬쉐의 장편소설 '격정세계'(강영희 옮김·은행나무)에선 가능한 일이었다.
 

▲ 매년 중국의 단골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찬쉐. [은행나무 제공]

 

중국의 카프카로 불리는 찬쉐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호명되는 인물이다.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더러운 눈' 혹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순수한 눈'이라는 뜻을 지닌 '찬쉐'(殘雪)의 본명은 덩샤오화(鄧小華)로, 1953년 생이다. 중국의 미래파 쯤에 해당하는 '선봉파' 대표주자로,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중 독자들이 쉽게 따라잡기 힘든 영역의 글쓰기를 지향해왔다. 장편 '황니가' '오향가' '마지막 연인' 등에 이어 최근에 집필한 '격정세계'(2022)는 찬쉐 소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작품이다. 문학을 믿는 이들의 '판타지'이자, 그 안에서 문학과 더불어 전개되는 가슴 뛰는 사랑이야기이며, 찬쉐의 자전적인 글쓰기 여정을 담은 문학론이기도 하다.

소설의 중심 공간은 '비둘기' 북클럽. 네 쌍의 남녀가 중심 성원인데, 이들이 문학을 읽는 태도와 토론, 성찰, 사랑이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소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책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책'이고, '청춘을 고뇌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하며, '소설을 읽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고 그 수수께끼들은 예외 없이 삶의 수수께끼'이다. 그들은 '한 권의 소설이 가진 매력이 얼마나 큰지, 놀랍게도 생활 리듬을 바꾸어놓기까지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꿰뚫어 볼 수 없지만 깊숙이 끌어당기고 한 걸음 파고들 때마다 기뻐할 만한 수확을 주는' 책으로 'XXXX'라는 소설에 공통으로 매달린다.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소설을 읽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XXXX'를 읽고 나서부터 한 가지 수수께끼가 주변에 형성된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소설의 매력인지 현실 생활에 수수께끼가 실제 존재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비둘기 북클럽에서 'XXXX'라는 책을 토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두의 일상생활을 토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샤오쌍이 추구하는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샤오쌍과 아저씨는 삶과 하나로 녹아드는 소설을 줄곧 찾았다.

샤오샹과 샤오마는 대형 쇼핑몰 매장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북클럽 성원. 샤오썅은 중후한 지성인인 '이 아저씨'의 영향을 받아 독서에 매진하는 여성이다. 이 아저씨와 어린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부자 관계처럼 친밀한 남자 '헤이스'가 샤오썅의 연인이다. 샤오마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이 아저씨를 흠모하며 사랑한다. 이 북클럽에 중졸 학력이 전부인 '한마'라는 쇼핑몰 후배 여성이 참여하고 그녀는 '페이'라는 북클럽 창설 멤버이자 문학전문가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  

 

 


주변 인물들의 도움으로 윌취월장하는 한마는 글쓰기로 접어들어 소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는데, 이 인물에 작가 찬쉐가 투사돼 있다. 찬쇄는 문화혁명기에 부모가 우익으로 몰려 고난을 겪는 바람에 할머니 밑에서 성장하면서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고, 이후 각종 직업을 전전하다 작가로 데뷔했거니와 이런 이력이 작중 '한마'와 유사하다. '소설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한마와 그녀를 격려하는 샤오썅의 대화.

"정말 이상하죠? 난 먼저 문학과 사랑에 빠졌고 그다음에 페이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둘이 마치 하나인 것 같아요."
"이상할 것 하나 없어, 한마. 문학이 뭐야? 바로 사랑이야, 그래서 네가 사랑에 빠진 거라고."

'문학이 바로 사랑'이라는 언설은 타당한가. 페이와 헤어진 한마를 사랑하게 된 샤오웨의 문학관에 작가 찬쉐의 판타지가 엿보인다. 샤오웨는 "나는 사랑에 대한 묘사에 각별히 주목했는데, 그것은 작가의 갈망, 즉 글을 쓰고 싶은 갈망과 일종의 연인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 텍스트를 바탕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우리 독자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는 "물론 어떤 사람들은 평생 글을 써본 적도 없고 발표해본 적도 없지만 자신의 사랑에서 작가의 사랑으로 잘 들어가기만 한다면 바로 작가를 통해 글을 쓰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한마와 어쩔 수 없이 헤어졌지만 문학을 매개로 관계를 이어가는 페이는 "당대의 일류 소설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능력이 부족하고 그 메커니즘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독자라면 그 소설에 진입하기는 쉽지 않다"고 보충한다.

'독자 역시 진지한 읽기만으로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논리에 동의하시는가. 샤오썅은 "이 장('XXXX'의 31장)에서 묘사하는 사랑은 정말 매력적"이라며 "몸과 마음을 다해 몰입해서 극치를 이루도록 사랑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사랑하는데, 소설을 읽는 것이든 소설을 쓰는 것이든 다 이럴 것"이라고 거들면서도 "소설 속 사랑과 질적으로 같은 사랑이 생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렇게 깊이 있게 체험하지 못하거나 아예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붙인다. 비둘기 북클럽의 임계점에 오른 토론은 급기야 '차오쯔'의 연인 '리하이'의 '흐느끼는 소리'로 이어진다.

여러분, 누군가 방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나요? 그것은 강렬한 사랑입니다. 입만 열면 울고 싶을 정도에 도달한 것이죠. 나는 문학의 문외한인지라 깊은 체험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방금 전 억눌린 울음소리를 들었지요. 아, 정말이지 도구를 이용해서라도 이 소리의 내적 강도를 측정해보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 책의 매력은 자신의 방식으로 용감하게 빠져들면 저도 모르게 작가의 자유 무대에 끼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는 누가 흐느끼고 있나요?

 

▲찬쉐는 "문학의 핵심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묻혀 있는 한 알의 씨앗과 같다"면서 "그 성장은 사람의 성찰적 시선에 달려 있다"고 작중 인물을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드러낸다. [은행나무 제공] 

 

이 정도면 거의 판타지에 근접하는 정황이기도 하다. 이렇게 가슴 벅차게 소설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 그들을 그렇게 만들 정도로 써낼 수 있는 작가란 모두의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찬쉐의 '격정세계'는 읽어나가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이러한 격정에 빠져들 여지를 제공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황막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잠시라도 다시 문학의 영혼으로 재충전하기를 바라는 배려일 터이다.

찬쉐는 "(한마는) 긴장을 풀려고 야단법석을 떨면서 자기 글이 다른 사람의 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고전 작가들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그런 부류에 속한 작가가 아니라, 글쓰기를 일상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삶을 사랑했다"고 쓴다. 소설 속에서 한마의 작품을 두고 "시대를 앞서가는지라 평론계와 독자층의 대다수 사람이 아직 그런 스타일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면서 "문학계의 몇몇 수준 높고 사상이 개방적인 전문가들이 한마의 작품을 특히 높이 평가하고 있어 그들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추천한다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날도 멀지 않았다"고 덧붙여 놓은 대목에서도 실제로 '선봉파'로 살아온 찬쉐 자신의 지난 시절을 엿보게 한다.

옮긴이 강영희는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기도 하고 찬쉐의 문학관을 고스란히 설파하는 작품이기도 하다"면서 "작가는 어떤 작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훌륭한 작품은 무엇인지, 작가와 독자는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독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문학이란 무엇이고 그 효용성은 무엇인지. 이뿐만 아니라 문학과 전파, 문학과 육체, 문학과 사랑 등의 다양한 주제가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얽혀 있다"고 썼다. 슬픔에서 벗어난 소설 속 남자의 말.

"맞아, 믿을 만한 건 문학뿐으로, 문학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저버리지 않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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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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