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서 일어나 최종 탈고한 '카호' 시리즈 갈무리
도구적·평면적 캐릭터에서 벗어난 첫 여성 주인공
'뉴요커' 게재 연작 첫 단편 '카호'로 엿본 신작 속살
"소설쓰기는 나 자신을 탐험하는 일, 계속할 터"
'평생 온갖 종류의 여자를 만나봤지만, 당신처럼 못생긴 여자는 처음 본다고 말해야겠군요. …당신이 가장 못생겼다고 말하는 건 좀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내가 본 여성 중 가장 특징 없이 평범하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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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여름 출간할 신작에서 처음으로 여성을 중심 화자로 내세워 새로운 젠더 감수성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무라카미 하루키. [위키미디어 코먼스] |
소개팅에 나간 '카호'에게 '사하라'라는 남자가 무참한 말을 내뱉는다. 마치 긴 혀로 개미집을 핥아 깨끗이 비우는 개미핥기처럼 카호의 생각을 읽어내는 이 남자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면서 "당신처럼 정말 평범한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평범하다는 사실이 실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만 600만 부 넘게 팔린 글로벌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 1949~)가 올여름 신작 장편을 선보인다. 주체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카호' 시리즈를 갈무리한 장편이다.
그림책 작가이자 아동도서 삽화가인 '카호'라는 여성을 내세워 전개되는 이 시리즈는 와세다대학 무라카미 라이브러리 낭독회(2024)에서 '카호, 여름의 돛'으로 처음 공개됐다. 이후 문예지 '신초(新潮)'에 정식 단편으로 게재한 이래, 이 잡지에 시리즈로 연재해 왔다. 최근 발간된 3월호에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최종편 '카호와 모터사이클 사내,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을 게재함으로써 이 연작은 마침표를 찍었다.
하루키는 올 초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최근 새 소설을 탈고했으며 이 책은 올여름 일본에서 출간된다"면서 "현재 영어로 번역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작년 한 달간 입원하며 체중이 18kg(40파운드)이나 빠졌을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았고, 회복 과정에서 이 소설의 상당 부분을 썼다고 말했다. 하루키는 새 소설을 두고 "일종의 부활이다, 내가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하루키는 "이번 이야기는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더 낙관적"이라면서 "처음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주로 서술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영역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그동안 하루키의 여성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도구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돼 왔지만, 그는 젊은 여성의 시점으로 쓰는 일이 생소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하루키는 "내가 그녀가 되었다"며 줄거리에 대해서는 함구했지만, 약간의 팁도 제공했다. 그는 "주인공 '카호'는 예술가이자 아동도서 삽화가이며, 이야기는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서 "그녀는 아주 평범하고, 특별히 예쁘거나 똑똑하지도 않은 여성인데, 그녀 주변에서 수많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하루키의 신작 소식을 문화사적 맥락에서 평가한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S. 윌스(David S. Wills)는 "여성 주인공으로는 '1Q84'의 아오마메가 있었지만 공동 화자 시스템이었다"면서 "하루키는 대개 젊고 고독하며 어떤 이유로든 곁의 여성을 잃어버린 남성의 관점에서 글을 써왔다"고 분석했다. 그는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하는 하루키의 집필 습관을 고려할 때, 이번 신작 역시 '뉴요커'지에 발표했던 '카호'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면서 "초기 구상에서 세부 내용이 바뀌었을 수는 있으나, 단편을 다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차기작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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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책 작가이자 아동도서 삽화가 여성 '카호'에게 대형 모터사이클을 몰고 다니는 남자가 거미처럼 나타나는 하루키 소설 삽화. 제미나이에게 부탁해 합성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신초' 발표작을 바탕으로 '뉴요커'에 영문으로 번역 게재한 첫 단편에서 카호는 남자의 무참한 말에 충격을 받기보다는 그저 불안하고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카호는 부모로부터 항상 깊은 애정을 받으며 성장했고 외모에 무관심했다. 카호가 "당신은 병든 사람"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자, BMW 대형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는 남자 '사하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것 같군요. 당신 말이 맞을 겁니다. 난 병든 걸지도 몰라요. 나 자신을 변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병든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훨씬 더 병들어 보이죠. 안 그렇습니까? 보세요—요즘 사람들은 외모지상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합니다. 대부분은 미인 대회를 큰 소리로 비난하죠. 공공장소에서 '못생긴 여자'라는 말을 내뱉으면 몰매를 맞을 겁니다. 하지만 TV를 보세요. 잡지를 보세요. 온통 화장품, 성형수술, 스파 트리트먼트 광고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 그건 우스꽝스럽고 의미 없는 이중잣대일 뿐입니다. 일종의 익살극이죠."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거대한 거미처럼 그가 아주 오랫동안 자신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려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카호는 생각한다. 그녀는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떠오르는 듯한 꿈을 꾼 후 곧장 책상 앞으로 가서 이야기를 썼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얼굴을 찾아 떠나는 소녀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시점에 소녀는 얼굴을 잃어버렸다. 그녀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 그것을 훔쳐갔다.
사방을 걸어 다니며 수많은 얼굴을 살피는 동안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의 얼굴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본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얼굴뿐이었다. 북쪽 땅의 어느 곶 끝에 앉아 완전한 절망 속에 울고 있을 때, 모피 코트를 입은 키 큰 젊은 남자가 나타나 그녀 옆에 앉았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럽게 물결쳤다. 젊은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지시하듯 바라보며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진 여자는 처음 봅니다.'
그 무렵, 그녀가 붙였던 얼굴은 그녀의 진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온갖 경험,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하나로 뭉쳐져 그녀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이었고, 오직 그녀만의 얼굴이었다. 그녀와 젊은 남자는 결혼했고, 그 북쪽 땅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이 책은 아이들, 특히 10대 초반 소녀들의 마음에 불꽃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어린 독자들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 넓은 세상으로 떠난 소녀의 모험과 시련에 열광했다. 글은 간결했고 카호의 그림은 상징적인 흑백 선화였다. 흥분한 편집자가 이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카호가 답한다. '아주 어둡고, 깊은 곳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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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속 흑백 선화(위)와 '여름의 돛'이라는 의미를 지닌 '카호'를 형상화한 제미나이 활용 삽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하루키는 산문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이며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이라면서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야기라는 것은 인간 영혼의 밑바닥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준다"면서 "나는 소설을 쓰면서 일상적으로 그 장소에 내려간다"고 썼다.
데이비드 윌스는 이 단편을 바탕으로 하루키의 신작 장편에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특징을 분석했다. 이상한 이름을 가진 남자(사막 이름 같은 '사하라'), 기묘하고 불길한 대화들, 기이하고 기억에 남는 이미지들, 주인공의 선택이 예상을 뒤엎는 전개, 이야기 속 기괴한 꿈, 궁극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테마 등이 그것이다. 그는 "단편 '카호'는 그녀의 외모에 대한 잔인한 비난들을 담고 있지만, 결국 여성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비난들을 원동력 삼아 성공과 자존감을 찾아가는 긍정적인 결말을 맺는다"면서 "하루키가 이 아이디어를 장편 전체에서 어떻게 밀고 나갈지 기대된다"고 밝혔다.
올가을 크노프(Knopf) 출판사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룬 짧고 강렬한 작품 '고양이를 버리다(Abandoning a Cat)'도 출간할 예정이다. 매일 달리기로 체력을 유지하던 하루키도 늙음은 버거웠던 모양이다. 병상에서 돌아온 그의 다짐.
"앞으로 소설을 몇 권이나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소설을 쓰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고, 마치 나 자신을 탐험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나이가 들어도 탐험할 공간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NYT, 2026.2.8)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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