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인연을 끊고 수도원으로 잠적한 여성 내면 바탕으로
왜곡되고 흐릿한 기억 견디면서 죽음, 속죄, 용서 성찰
"수녀님, 강간범을 찔러죽였어도 여전히 성녀였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의지가 아닌 관심으로 치유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관심, 가장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관심은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믿음과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관심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선(善)을 향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면 영혼 전체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선으로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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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실의 기도' 한국어판을 펴낸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여성 작가 샬럿 우드. 그는 "이 책은 오래된 상처를 다시 파내고 또다시 묻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살럿 우드 북트레일러] |
오스트레일리아 여성 작가 샬럿 우드(Charlotte Wood·1965~)가 펴낸 장편 '상실의 기도'(박찬원 옮김·은행나무)에서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1909~1943)의 말을 인용한 대목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순수한 관심은 그 자체가 '기도'라는 의미인데, 샬럿 우드가 이 소설에서 시종 관심을 기울이는 상실과 속죄와 용서에 대한 성찰은 그런 의미에 부합한다. 상실과 왜곡된 기억을 견디어내며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은 글쓰기는 그 자체로 기도의 형식이다. 문학이 곧 기도가 되는 경지는 전율이다.
우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2023년 출간한 이 장편(원제 Stone Yard Devotional)으로 2024년 부커상 최종심까지 진출했다. 이 작품 집필은 팬데믹 기간에 더 깊어졌고, 최대한 살을 발라내 뼈대만 남길 정도로 깎고 다듬는 조각 끝에 내놓은 '수도원 일기'에 가깝다. 그 자신 암 투병 끝에 살아남았으며 긴밀하게 소통하던 두 자매 역시 암으로 고생을 하던 와중에 펴낸 장편이어서, 삶과 죽음과 용서와 속죄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질문이 소설 전편 바탕에 흐른다.
멸종위기종 보호센터에서 일하던 여성이 하루아침에 세상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자신이 태어나 성장기를 보냈던 황막한 평원 지대의 수도원으로 간다. 이메일도 차단하고, 온갖 단체의 구독도 끊고, '집'을 찾아 간다. 그 집이란 화자의 옛집이 아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이지만, 부정할 길 없이 명백한 '나의 집'으로 느껴지는 공간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고원지대 모나로 지역에서 나고 자란 우드의 소설 속 화자는 삭막하고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그곳 평원에 자리잡은 수도원으로 스며들었다. 그곳에 가는 길에는 마을에 들러 35년 만에 부모의 묘지도 찾았다. '얄팍하고 각진 평원이, 닳아빠진 스웨이드처럼 황량한 평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곳을 지나면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지명들이 '마치 알알이 묵주처럼, 내 몸의 뼈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듯' 생각났다. 수도원은 '충격적일 정도로' 평화로웠다. 화자는 '작금의 세상에서 이런 종류의 고요함은 급진적으로 느껴진다'고 되뇐다. 끝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이 여성의 평화는 지속될 수 있을까.
시종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상실에 대한 성찰이 바탕에 흐른다. 쥐가 한두 마리 등장하다가 수가 늘어나 쥐떼가 되고, 쥐들의 사체 더미를 매일 파묻는 것이 일상이 되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다. 여기에 다양한 죽음의 사례들이 회상 속에 등장하고, 태국에서 오래전 살해당했다가 뒤늦게 발굴된 수녀의 뼈가 돌아오는 과정이 한 축을 이룬다. 화자의 고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던 저항적 기질의 수녀가 유해와 함께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확장되고 심화된다. 우드는 말한다.
"이 세 가지 사건이 모이면서 이야기는 어떤 '결산' 같은 지점에 이릅니다.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용서란 무엇인가? 누가 용서할 권리를 갖는가? 또 누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장편은 과거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고, 저에게도 옛 땅을 다시 방문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쥐떼가 갈수록 늘어나는 배경을 바탕으로 여러 죽음들이 회고된다. 고등학교 시절 어떤 남학생의 어머니가 소들을 도로 밖으로 이동시키다가 차에 치어 죽은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기 머리에 총을 쏜 농부, 실종된 어린 양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가 뼈로 남아 발견된 죽음 들은 그나마 '성녀'로 추대된 이들에 비하면 덜 논쟁적이다. 대표적으로 제니 수녀는 수녀원에서 은둔해 기도로 세월을 보내는 방식을 비난하면서 태국으로 가서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해 봉사하다, 성폭행을 자행한 미국인 신부에게 살해당한 뒤 실종됐다가 뼈로 발견돼 돌아오는 경우다. 사람들을 그녀를 '성녀'로 추대하려 하는데, 이는 산자들이 괴로움을 견디는 방식일 것이라고 화자는 생각한다.
마리아 고레티는 열살 때 흉기에 찔려 죽고 성녀가 된 소녀다. 마리아는 25센티미터 길이의 송곳에 14번 찔렸다. 마리아가 '죄 짓는 것을 거부하여 흉기에 찔렸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알렉산드로가 마리아 고레티를 죽인 것은 그녀가 '지옥에 떨어질 큰 죄'를 짓는 일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가톨릭 고등학교 시절 수녀 선생은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병원에서 죽어가면서도 살인자를 용서했다는 사실인 듯 했다. 알렉산드로는 7년 만에 감옥에서 나와 마리아의 어머니를 찾아갔고, 그녀는 딸을 죽인 그를 용서했으며, 다음날 두 사람은 미사에 가서 함께 영성체를 받았다. 알렉산드로는 평수사가 되어 수도원에서 평생 일하다가 여든일곱의 나이에 평화롭게 자연사했다. 화자는 묻는다. 왜 순교는 '살해'라고 부르지 않는지, 용서와 속죄의 본질은 무엇인지.
'수녀님, 만일 마리아가 칼에 찔리지 않고 그냥 누워서 눈을 감고 그 죄악을 견뎌냈더라면, 그래도 여전히 성녀였을까요? 수녀님, 만일 마리아가 알레산드로를 송곳으로 찔러 죽였더라면, 그래도 여전히 성녀였을까요? 수녀님, 마리아의 어머니가 알레산드로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얼굴에 침을 뱉고 사타구니를 걷어찼다면, 총으로 쐈다면, 칼로 그의 성기를 잘랐다면, 그래도 마리아가 여전히 성녀였을까요?'
제니의 유해를 안고 돌아온 헬렌 패리 수녀는 한마디로 순종하지 않는 적극적 저항형 캐릭터이다. 학창시절 그런 기질로 인해 왕따를 당하고 어머니로부터 학대도 받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숨지 않고 나서서 행동으로 세상과 맞서는 경우이다. 화자가 고등학교 시절 그녀와의 싸움을 후회하며 용서를 뒤늦게 구하지만 헬렌은 용서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며 비웃는 씁쓸한 연민의 미소만 지었을 따름이다. '용서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짊어지고, 그 무게와 함께 살아가는 속죄'도 있는 법이다.
시몬 수녀는 기도에 대한 화자의 냉소를 책망한 적이 있다. 그녀는 기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유치하다고 지적하며 하느님에게로 이어지는 전화선 따위의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이건 하느님과 상관없다고, 기도는 자신의 습관적인 생각을 끊어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나 자신을 타자에게 허락하는 것, 자신의 편견을 깨부수는 것, 그건 수다가 아니라 힘든 노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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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트레일리아 모나로 평원 지대를 찾은 샬럿 우드.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춥고, 아름답고, 거칠며 원초적 풍경인 이곳을 무대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북트레일러] |
옮긴이는 "우드는 혼돈 한 가운데서 기억의 작은 파편들을 떠올리고 그에 대한 내적 성찰을 통해 조용한 힘을, 명징한 고요함을, 담담한 고독을 보여주며, 실패와 절망, 죽음과 생존, 가족과 사랑, 상실과 극복, 용서와 화해를 성찰한다"면서 "독자 또한 호주의 드넓은 평원처럼 여유로운 여백에 한가로이 배치된 이야기 조각들 사이를 건너가다 문득 멈추어 서서 우드가 가만히 내민 화두를 생각하게 되는 느리게, 느리게 읽게 되는 책"이라고 썼다.
우드는 "소설을 쓰는 과정을 점토 덩어리를 다듬는 조각가에 비유해 이야기하곤 한다"면서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점토를 다듬기 전에 먼저 그 점토 자체를 '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소설론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바로 그 점토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어수선하고, 혼란스럽고, 우연이 스며들며,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는 단계"라면서 "일단 그 점토가 생겨나고 나면, 비로소 그것은 이야기가 되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황야에서 발굴한 점토는 왜곡과 오류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기억 덩어리였다. 그 점토를 앞에 두고 회한과 속죄와 용서 사이를 오가며 견디어낸 상실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기도가 된 셈이다. 문학이라는 기도, 그것은 고발과 비판을 넘어서는, 예술이 해낼 수 있는 지고의 경지이다. 우드의 말.
"가끔 세상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콕 집어서 보여주는 소설을 읽곤 하는데, 저는 그런 식으로 쓰고 싶지 않아요. 변화는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그 슬픔을 어떻게든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슬픔을 형상화하고, 다른 것들과 결합하는 것이죠."_ ('The Guardian' 2023)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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