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부터 2018년 9월까지 1년간 나홀로 SUV 차량을 타고 46개국 7만9365km에 이르도록 종횡무진 대륙을 달린 사나이가 있다. 장용우. ‘왕초’ ‘호텔리어’ ‘행복합니다' 등 수십편의 MBC, SBS 드라마와 JTBC ‘D데이’ 등 대작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가 이번엔 평생 꿈꾸어 오던 드라마형 로드다큐를 만들었다. UPI뉴스 온ㆍ오프라인 채널에 ‘장감독의 대륙횡단’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유럽과 아시아 대륙 곳곳의 현장에다 온몸을 던져 이를 담은 영상과 기사. 그 장대함과 정교함 그리고 감동은 우리를 또다른 세계로 이끈다. [편집자주]
시베리아 늑대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라라를 떠나 보내던 지바고가 이층으로 달려 올라가 유리창을 깨고 설원 너머로 사라지던 썰매를 바라보던 그 저택, 이젠 지바고마저 사라진 그 폐가가 틀림없었다. 달빛이 눈 덮인 마당을 파랗게 물들인 새벽, 시인이 잠에서 깨어 시를 쓰던 그 책상을 찾아 기웃거렸다. 나도 시 한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책상은 보이지 않았고 음산한 시베리아의 밤바람이 불어왔다. 갑자기 바람에 실려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안전한 차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차문이 꼼짝 않는다. 얼어붙었나? 아뿔사. 주머니에 키가 없다. 주인이 다가가면 요사스런 웰컴라이트를 켜며 아양을 떨던 나의 쏘렌토가 주인을 몰라본다. 단지 리모콘 열쇠 안가졌단 이유로. 설마. 이럴수가. 키를 자동차 안에 두고 문을 잠근 거다. 당황하면 멍청한 짓을 하게 된다. 조수석 문도 열어보고 뒤 트렁크도 당겨보지만 반응이 없다. 당연하다. 멀리서 들리던 늑대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한마리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테지만 늑대는 떼로 다닌다. 혹시 곰은… 아, 시베리아의 폐가에서 곰을 만나는 것은 정말 대책없는 일 아닌가.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 하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최고로 많이 생산된 AK47 소총이라도 하나 장만해 둘 걸. 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온다. 바람에 묻혀 눈썰매의 방울소리 같은게 들렸다. 아닌가? 천둥소리 같기도 하다.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새벽 다섯시를 알리는 핸드폰 알람이었다. 악몽이었다.
그 소리는 핸드폰 알람이었다, 악몽이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무장하고 산다. 비가 올까봐 우산을 챙기고 길을 잃을까봐 구글맵, 맵스미를 스마트폰에 깔고 그것도 미심쩍어 지도책을 사기도 한다.(스마트폰이 방전되거나 깨지면 작동이 안될까봐) 쏘렌토는 차안에다 키를 방치하면 경고음이 울리고 문이 잠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행을 하는 동안 가장 큰 걱정은 혹시 자동차키를 차안에 둔 채 문이 잠기거나 키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여행은 일상의 탈출이자 정상궤도로부터의 이탈이다. 비정상적인 돌발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돌발상황이 하필이면 시베리아에서 당하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베리아는 매우 특별하다. 자동차여행자에겐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성스레 모아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곳이다. 그럼 조심스럽게 선물 상자를 열어보도록 하자.

선물 1 도로
시베리아 횡단도로(Trans Sibrian Highway)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만600km에 이른다. 지구 전체 면적의 10%에 해당하는 1310만 제곱킬로미터의 시베리아는 서쪽 우랄산맥에서부터 동쪽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북으로는 북극해, 남쪽으로는 카스피,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과 경계를 이룬다. 이걸 관통하는 도로건설이 시작된게 1966년이었는데 실제 삽질은 1978년이었다고 한다. 2010년 완공 목표였지만 도로는 아직도 건설 중이다. 러시아 정부는 다 포장되었다고 발표했는데 2017, 2018년 운전하면서 여전히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했다. 틀림없이 공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포장률은 거의 99%에 가깝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영하 20도에서 영상 30도까지 차이나는 혹독한 기후 조건, 그다지 훌륭해 보이지 않는 건설 실력, 엄청나게 달려대는 트럭들 때문에 새로 포장된 곳에도 금방 포트홀이 생겨난다. 단순히 좀 깨진 정도가 아니다. 자동차여행자에게는 지뢰 수준이다. 더위에 녹아서 울퉁불퉁 한곳도 많다. 흔히 빨래판 도로라고 부르는 잔물결 같은 도로는 비포장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스팔트에도 있다. 누더기(깨진 아스팔트를 임시로 패치하는게 반복되면서 다양한 색깔 문양의 조각보 같은 걸레 도로), 빨래판, 울리불리(짧은 파장, 긴 웨이브), 밭고랑(녹은 아스팔트 위를 무거운 트럭들이 밟고 지나가서 파여있는 도로인데 차체가 낮은 차는 바닥이 닿기도 한다) 등등. 심심할 때는 도로 작명에 골몰하기도 했다. 특히 긴 웨이브 도로를 좋아했는데 타이밍을 잘 맞추어 액셀을 밟으면 잠시 공중부양의 무중력을 체험할 수도 있다. 바퀴와 서스펜션, 하체에 엄청난 무리가 온다. 시베리아 도로의 다양성에 관해서는 박사논문 하나는 족히 나올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사흘째, 첫눈이 폭설이었다
선물 2 날씨
하바롭스크의 겨울 최저 기온은 -24도 정도라고 하는데 -40을 기록한 적도 있다. 9월이면 아침에 영하로 떨어진다. 겨울운전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어물쩍 떠나다 보니 9월말 출발이었고 블라디보스토크을 떠나 사흘째인 10월 1일 눈을 만났다. 첫눈이 폭설이었다. 어딜 가거나 평균기온과 강수량 같은 기본적인 데이터를 미리 점검해 두는 것이 좋다. 이왕 당할거 알고나 당하자. 시베리아는 특히 다르다. 시베리아의 겨울과 장난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선물 3 주유소와 휴게소
기름값은 정말 착하다. 몇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들만 지적한다. 우선 휘발유, 경유를 잘 구분해야 한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영어를 쓰지 않는다. 알파벳도 다르다. 러시아문자를 키릴문자라고 하는데 이게 좀 많이 다르게 생겼다. 문자보다 발음은 더 기가 막히게 다르다. 구개음화가 심해서 디젤을 지젤로 발음한다. “가득이요”는 안 통한다. ‘가득’을 러시아어로 ‘뽈느이’라고 하는데 시베리아에선 무조건 몇리터(리뜨르)라고 물어온다. 자신의 자동차 연료탱크의 용량을 알고 있어야 한다. 주유펌프도 제각각이다. 어떤 펌프는 손잡이에 작은 밸브가 하나 더 있거나 주유기에 비밀스러운 버튼을 눌러야 주유가 되기도 한다. 모두 다 셀프서비스이기 때문에 버튼 찾느라 밤을 새울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건 없다. 간이 휴게소 같은게 있는데 대부분 주유소에 딸린 자그마한 식당 정도이다. 화장실 이용하는데 돈을 받는다. 동전이 필요하다. 트럭을 위한 휴게소가 가끔 있다. 자동차 정비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보드카도 마신다. 이런 휴게소에 있는 화장실은 끔찍하다. 자연 친화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경우도 없지 않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다음날 자동차를 찾았다. 통관대행사의 에이전트를 따라 다니며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고 세관에 가서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서류에 서명한 다음 시키는 대로 돈을 내고 부두에 가서 차를 찾아왔다. 타이어가 찢겨 있거나 유리창이 깨지지 않고 무사히 나의 품으로 돌아온 차가 대견스러웠다. 자동차여행자들은 자신의 차에 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철과 플라스틱의 무심한 조형물을 여행의 동반자로 승격시키는 의인화를 통해 애착을 가지는 것은 좋아 보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쏘렌토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줄까. 징그러운 생각이 들어 작명을 포기했다. 저녁엔 호주인 Ironbark Walduck과 파키스타인계 미국인 Farooq Tariq를 만났다. 우리는 이스턴드림호 갑판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항구를 배경으로 각자의 사진을 찍어주는 의전을 통해 친구가 되었다. 아이언박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갈 계획이고 파룩은 뉴욕에서 가져온 오토바이를 타고 시베리아를 건너 몽골을 통과한 다음 고향 파키스탄을 찾아갈 예정이라 한다.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기원하는 도원결의를 했다. 나를 형님으로 모셔줄 것을 강력히 기대하면서 술값을 계산했다.

차를 찾으면 다음날 바로 출발하리라 마음 먹었는데 하루를 연기했다. 게스트하우스 장원구 사장이 안내하는 시내투어에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웠고 물과 부탄가스 등의 보급품도 장만해야 했다. 그게 전부였을까? 아마도 핑계였을게다. 선뜻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 머뭇거림의 이유는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것 같은, 감당해 내리라는 확신이 없는, 돌다리 한번도 두드려 보지 못한 불안전한, 그리고 정체불명의 여러 감정이 칵테일된 두려움이었을 게다. 어쩌면 실수로 일생일대의 허세를 부린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출발전날 장사장은 북한식당 평양관에서 들쭉술을 권하며 여행을 축복해 주었다. 명태식해를 곁들였다. 들쭉술 바람에 잠 설치고 악몽을 꾼 것일까?
모두다 숨죽여 나의 출발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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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바트 거리. 관광시즌에는 거리의 반 이상이 한국인이다. |
새벽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기로 했다. 차 막히기 전에 도시를 빠져 나가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하루에 얼마나 가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날 하바롭스크까지 간다면 약 800km, 10시간 정도를 잡아야 하는데 도로도 익숙치 않고 자동차의 상태도 점검해 가면서 주행하다보면 추가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구글맵에서 알려주는 시간에 30%는 더해 두는게 안전하다. 거기다가 밥먹고, 쉬고, 사진 찍고 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1.5배는 봐두어야 한다. 오도미터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 두었다. 6만336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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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다보이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
아르바트 거리를 빠져 나와 언덕을 올라 독수리전망대 부근의 갓길에 차를 세운다. 거리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항구 저편의 바다는 가을안개에 잠긴 채 고요하다. 항구의 불빛도 움직임이 없다. 가로등도 꼼짝 않는다. 모두 다 말 없이 소리 없이 숨죽여 나의 출발을 응시한다. 그래, 이제 떠나는 거다. 가로등이 꺼졌다. 시동을 켰다.
KPI뉴스 / 글·사진 장용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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