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준비로 국회의원보다 바쁜 지방의원…갑을관계가 족쇄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3-07-12 14:49:48
부르면 달려가는 지방의원…"지역구 세포 조직" "시다바리"
후원금 지원·공천 헌금·사무소 운영비 대납 등 부작용
"주민보다 공천권 쥔 국회의원 눈치 봐야 하는 게 문제"
정당 공천제 재검토 불가피…대안 마련 필요 목소리 ↑
내년 4·10 총선이 아홉 달 앞으로 다가왔다. 국회의원은 선거 준비로 하루가 짧다.
지역구가 비수도권인 국민의힘 A 초선 의원. 그는 월~수 주중 사흘만 서울에서 지낸다. 꼭 필요한 당무와 의정 활동을 위해서다. 목~일 나흘은 지역구에서 산다. 각종 민원·행사를 챙기며 표밭을 다지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고 한다. A 의원은 14일 "지역에서 의원 얼굴 보기 힘들다는 소문이 돌면 큰일"이라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야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의원보다 더 바쁜 사람들이 있다. 광역시·도, 시·군·구의 광역, 기초의회 의원들이다.
지방의회 의원들은 국회의원이 주민 접촉, 행사 참석 등으로 지역구를 돌면 대부분 동행한다. 의원이 부르면 상시 '출동'해야 하는 게 지방의원들 처지다. 재선을 노리는 B 의원은 "내가 직접 가야 하는 지역구 대소사에는 도, 시의원도 참석해 품앗이를 해준다"며 "이들은 지역구의 세포 조직"이라고 강조했다.
국회의원은 서울로 올라가면 지역구 일을 잠시 손에서 놓지만 지방의원은 그렇지 않다. 지지세 확산을 위한 당원 모집과 읍면동 조직 관리 등 늘상 해야 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의원과 당에 유리한 여론을 전파하는 것도 이들 몫이다. 이런 활동을 위한 경비의 태반도 지방의원이 감수해야 한다.
서울의 C 의원은 2020년 총선 때 지역 기반이 약해 중앙당 지원에 의존하며 힘겹게 당선됐다. 당시 구의원 출신의 D 씨가 C 의원 대신 지역 기반을 닦아주고 선거 자금도 보태준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으로 큰돈을 모았다는 D 씨는 C 의원의 재선을 위해 지역구에서 다시 뛰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 사정에 밝은 한 정치권 인사는 "근래에도 D 씨가 주변을 움직여 C 의원의 후원금을 조달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귀띔했다.
지역구 의원이 총선에서 이겨야 그에게 줄을 댄 지방의원들도 재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이들이 지방선거에서 살아남아야 의원을 돕는다. "지방선거를 잘 치르면 총선 절반은 승리한 셈"이라는 게 정설로 통한다.
국회의원은 지방선거 때 지역구 내 지방의원 후보 공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갑'이다. '갑을 관계'는 지방의원이 국회의원에게 쩔쩔매게 하는 족쇄로 작용한다.
다음 공천을 바라는 '슈퍼 을' 지방의원으로선 국회의원의 은밀하거나 무리한 요구까지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홍준현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지방의원이 주민들보다 공천권을 쥔 국회의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갑을 관계는 밀실 공천, 줄세우기 등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 능력 있는 일꾼이 애초 주민 선택에서 배제될 수 있다. 대표적 폐해는 공천 헌금이다.
서울에서 구의원을 지낸 E 씨는 2000년 전후 지방선거를 떠올리며 "그때는 '5당4락'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전했다. 지방선거 공천을 받으려면 5억 원은 써야 하고 4억 원 쓰면 떨어진다는 얘기다. 2010년 '5당4락'은 '7당6락'으로 바뀐다. 기초단체장 공천을 받으려면 7억 원은 내야 한다는 것이다. 광역의원 공천엔 3억 원가량 든다는 말도 있었다.
지난해 6·1 지방선거 전후 전·현 의원의 후원금 수수와 관련해선 공천 대가 의혹이 제기돼 구속되는 사람이 생겼다. E 씨는 "작년 수도권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하려던 사람이 억대의 상납금과 수천만 원의 배달료를 건넸다가 문제가 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UPI뉴스가 중앙선관위로부터 서울 지역 한 초선 의원의 2020~2022년 고액 후원 내역을 제공받아 분석한 결과 상당액이 지방선거 공천을 노렸던 예비 후보자와 지역 청년위원장 등의 후원금으로 채워졌다. 서울시의원 출신의 한 인사는 1998년생인 딸 명의로 2021년과 2022년 각각 개인 후원 최대치인 500만 원을 냈다.
지방선거 출마자의 국회의원에 대한 고액 후원은 공천 헌금과 달리 불법은 아니지만, 갑을 관계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합법적인 공천 자금 창구'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현 국회의원의 지역구 사무소 운영비를 지방의원에게 부담하게 한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국민의힘 이강환 전 고양정 당원협의회 사무국장이 올해 초 폭로한 내용이다. 김현아 전 의원 지역구인 고양정에서 차명 계좌를 활용해 당협 사무소 운영 회비를 걷었는데, 그 대상이 대부분 전·현직 경기도의회 의원들과 고양시의회 의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이 '지배-예속 관계'라고 규정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여러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간 단수 공천 지양 등 공천제 관련 개선 방안이 제시됐으나 이것만으로는 갑을 관계 해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정당 공천제 논의를 피할 수 없다.
정당 공천제는 2006년 지방선거부터 실시됐다. 하지만 순기능보다 중앙 정치에 대한 지방 정치의 예속 등 역기능이 심해지면서 폐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문재인 후보 모두 기초의원·단체장에 대한 정당 공천제 폐지를 공약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19대, 20대 국회에서도 공천제 폐지 법안이 발의됐지만 폐기됐다. 수도권의 한 광역의원은 "제도를 유지하면 지방의원을 계속 '시다바리'로 만들 수 있는데 국회에서 바꾸겠나"라고 반문했다.
폐해를 줄일 방안을 마련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다. 광역시·도나 시·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정당을 허용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다. 이렇게 하려면, 서울에 중앙당을 두고 전국에 5개 이상의 시·도당을 갖추도록 한 정당법을 바꿔야 한다.
주요 기성 정당 이외의 대안 세력이 지방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시민단체 등이 일정 조건을 갖추면 '확인 단체'로 등록하고 지방선거에서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한 일본 등이 참고 사례로 제시된다.
다음 지방선거까지 시간은 충분하다. 관건은 정치권 의지다.
KPI뉴스 / 탐사보도부 김덕련 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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