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끝난 사랑은 없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4-20 22:46:55
출향 50년 만에 고향의 정체성 탐색하는 1호 시집
미군 활주로 옆 600년 팽나무 지키며 새로운 활동
빼앗긴 공간에 새로운 중심 세우는 '야트막한 사랑'
백중사리 둥근 달이/ 선창횟집 전깃줄 사이로 떴다/ 부두를 넘쳐나던 뻘물은 저만치 물러갔다/ 바다 가운데로 흉흉한 소문처럼 물결이 달려간다/ 꼭 한번 손을 잡았던 여인/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뜨거운 날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할 수 없는 곳을 통과하는 뻘물은 오늘도 서해로 흘러들고 _'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었다' 부분
강형철 시인은 서울에서 군산으로 귀향할 때 장항선 열차를 타고 내리면 금강 하구를 배로 건너 도선장에 내렸다. 바닷가에 즐비하던 포장마차 장막을 열고 들어가 비릿한 갯내음 속에 소주 한 잔을 들어 올릴 때 비로소 고향을 실감하곤 했다. 썰물처럼 뻘밭을 힘겹게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뜨거운 날은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짱뚱어 한 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잦아드는 밀물'로 돌아오곤 했다. 떠나도 떠나지 않는 '야트막한 사랑'이다.
그가 고향에 정착해 출향 50년 만에 군산이 기저에 깔린 시편들을 중심으로 그간 써온 시들을 가려 뽑고 근작시를 추가한 '가장 가벼운 웃음'을 펴냈다. 말랭이마을 독립서점 '봄날의 산책'(대표 박모니카)에서 펴내기 시작한 '군산시선' 1호 시집이다. '도선장 불빛…'이나 '야트막한 사랑'을 쓰던 날들은 오래 전이지만, 여전히 '끝난 사랑은 없다고' 근작시('형제섬')에 썼다. 그의 '사랑'이 지향하는 도달점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이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기 위해 일시 귀향해 서울로 출퇴근을 하다가, 노모가 떠나고 숭의여대 교수 정년을 마친 후 2017년부터 아예 군산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1973년 고교 졸업 후 상경한 이래 50년 가까이 객지에서 살다가 귀향한 그는 새로운 중심에서 '사랑'을 꿈꾸고 있다. 군산 미군 비행장 탄약고로 인해 주민들이 축출된 '하제' 의 빈 마을에 서 있는 600년 된 팽나무 지키기 운동이 하나이고, 군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선집과 친일파로 매장된 군산 출신 '탁류'의 작가 채만식(1902~1950)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일이 그것이다.
이번 시선집에는 그가 그동안 펴낸 '해망동 일기'(1989) '야트막한 사랑'(1993)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었다'(2002) '환생'(2013) 등 4권의 시집에서 가려뽑은 시들과 근작시 14편이 함께 수록됐다. 첫 시집 '해망동 일기'는 옥구군 미면 바닷가 고향 마을이 군산시로 편입돼 그 공간에서 살아가던 해망동 사람들 이야기와 풍광을 담았다. 일제 강점기에 호남평야 물산의 수탈기지로 기획 조성된 군산은 광복 후 미군이 접수했다가 6.25전쟁 이후 다시 미군 비행장이 있는 공간으로 이어졌다. 강형철의 어린시절은 미군들이 북적거리던 '아메리카 타운'과 갯벌 냄새가 중첩돼 있다.
더러는 손끝을 물기도 했지만 뻘 한 줌 집어 구멍에 들이밀면 뻘로 나오는 꽃게, 양동이 속에 담아 바닷물로 썩썩 헹구면 붉은 꽃잎이 어룽거렸고 석양이 붉은 노을로 이마를 때리면 종아리의 뻘을 씻고 논두렁길을 걸어 돌아왔다.// 세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_'해망동 일기 6' 부분
군산역에서 만나 이광웅 시인의 시비가 있는 금강 하구언 휴게소를 들러 산모롱이 말랭이 마을 카페에 앉았을 때, 강형철 시인은 "첫 시집을 내던 당시에는 막연하게 이 세계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생각들이 정제돼가면서 미세한 일상에도 시선이 가는 과정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군산제일고등학교 국어교사 시절 소나무 밑에서 월북 시인 오장환을 읽었다고 잡혀가 모진 고문 끝에 수감생활 중 숨진 이광웅 시비에는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는 '목숨을 걸고'가 새겨져 있다. 강형철 시론에도 '시란 목숨의 반성문'이라는 '목숨'이 걸려 있다.
작가회의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선생님의 전화가 왔었습니다/ 야 받아적어라 시가 한 편 써져부렀다/ 수화기에 금이 갈 정도로/ 온몸으로 불러주던 시가 책상 위에 씌어졌고/ 선생님은 또 얘기하셨습니다/ 이놈아 시란 무엇이냐/ 글쎄요/ 시란 무엇이냐 말이다. 시란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듣자하니 순 싸가지 없는 놈들이 붓대 끝으로 깔짝거리고/ 감동이 어쩌니저쩌니… _'사랑을 위한 각서 1 –천승세 님께' 부분
강형철은 한국작 가회의의 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차장, 사무국장, 상임이사 등을 맡아 격변의 시절에 실무자로 복무했다. 당시 환경을 배경으로 쓴 드문 시편 중 하나가 소설가 천승세(1939~2020)의 말을 빌린 '목숨론'이다.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말로 치면 삶과 문학을 말할 때의 삶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삶이 더 우위에 있는 개념이라는 말이죠. 자기 삶을 통과하지 않은 채 관념적으로 인식된 어떤 주장도 진짜 시가 될 수 없다는 맥락입니다. 붕어빵 팔던 사람이 전날 안 팔린 거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넣어 덥혀놓고 꼬마가 오면 지금 금방 나왔다고 파는 것과 비슷한 행태의 시들이 많아요. 사물과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가 변동이 없는 한 비슷한 얘기를 소재를 달리해서 그냥 습관적으로 시집을 내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실패를 하든 어찌 됐든 스스로 좀 바뀌었다고 생각할 때, 기존에 쓰던 시와는 좀 다른 것들을 썼을 때 시집을 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에 스며들어 체화되지 않는 한 쉬 시를 쓰지 못한다는 강형철은 이즈음 들어서는 아버지가 물려준 '가난의 뜻'이 새롭게 다가온다고 했다.
아버님이 물려주신 가난의 뜻을/ 소중하게 간수하지 못하고/ 오늘 저는 도회지를 방황합니다/ 때로 술에 취해 길가에서 잠을 잡니다/ 꿈속에선 아버님이 무릎까지 빠지며 모쟁이를 하시고/ 논두렁에 서 있는 저에게 손짓하고 계십니다/ 어서 가라고, 콩모종 밟으면 안 된다고/ 온몸이 떨려 일어나면 아버지/ 저는 도회지의 어느 처마 밑에 누워 있습니다/ 아버님의 가난을 간수하는 것은/ 어설픈 돈벌이나 기웃거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고/ 몸을 털며 일어나지만 아버님/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_'아버지의 사랑말씀 4'
"가난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겨나잖아요. 아버님이 물려주신 가난의 뜻은 그때는 몰랐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어떤 삶의 이야기인 거죠. 자기 욕망껏 살게 되면 갈등과 싸움들이 생겨나는 건데 알고 보면 적당히 약간의 결핍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짜 평화의 원천이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조금 적당히 가난할 때 살기 편했고, 사람들과 활달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내 필요를 충족하는 순간 결국 그 충족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에게는 원한이 되기도 하고, 갈망이 되기도 하고, 이 세상의 갈등이 생겨나는 거지요."
주민들이 미군 탄약고 안전거리 확보 문제로 쫓겨나 국방부 땅이 된 하제 마을, 그 빈 공간을 지키고 있는 팽나무 아래에서 문정현 신부를 중심으로 매월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강형철은 이 모임에 참여해 생태운동의 측면까지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펼치는 중이다. 5월 20일에는 작가 시인들을 팽나무 아래 불러 모아 관심을 환기할 작정이기도 하다.
시선집 뒤에 해설을 붙인 이영진 시인은 "강형철은 결기를 세운 임전무퇴의 싸움꾼이라기보다 적의 사나움을 소리 없이 지워가는 평화주의자에 가깝다"면서 "그는 평등이 어긋난 세태와 구조에 분노할 때가 많지만 전투가 멈춘 평화로운 순간에 그만의 장기인 웃음을 찾아낸다"고 썼다. 실제로 강형철이 있는 공간에서는 싸움이 없으며, 싸우던 이들도 곧 화해를 하곤 했다. '평화주의자' 강형철의 품성은 시편들에서도 보인다.
나 아무래도 이제 갈 것 같아야// 어딜 가실라고요// 남들 다 가는 데// 하이코 엄마! 차비도 없음서 어디가신다고 그런댜/ 엄마는 여든도 넘어 잘 걷지도 못하잖어// 그게 아니고.../ 응 그게 아니고...// 어머니는 순간 손으로 나를 불러/ 가만히 내 손을 쥐신다// 엄마 아직 멀었어/ 나랑 제주도도 가야하고/ 누나도 봐야잖어!// 나는 연신 딴소리로 넘어가고...._'예후'
어머니가 자꾸만 어디로 갈 것 같다고 하소연하자 '차비도 없음서' 라고 대꾸하는 아들. 치매 걸린 노모를 재우기 위해 아들 말이라면 무엇이든 반대한 적 없는 노모에게 '아들 공부해야 한다'는 말로 '수면제'를 처방하는 이야기들. 웃음이 나면서도 눈물겹다. 정체성이 모호해진 고향 땅에 새로운 중심을 세우려는 시인의 '사랑'은 다시 점화되는 중이다.
사랑하나 갖고 싶었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이/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짱뚱어 한 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잦아드는 밀물 -'야트막한 사랑' 부분
KPI뉴스 / 군산=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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