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생의 동토를 걸어온 인간들에 바치는 헌사"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2-01 16:40:22
장편에 집중한 세월, 뜸 들여 완성한 단편 8편 수록
'제도'라는 것의 비본질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유
"생은 인연의 허무가 대기하는 정류장들의 노선"
-생은 인연의 허무가 대기하고 있는 정류장들의 노선이다. 좋았건 싫었건 이별의 맛은 늘 공허였다. 미세한 사금파리 가루가 적막한 한밤에 눈 내리듯 가슴에 흩어지는 기분이랄까. 사탕가루도 아닌 이 화학물이 심장에 달라붙기 전에 생수 2리터로 씻어내리든 보드카와 섞어 토하지 않으면 오래오래 제자리에 내려앉은 채 재가 될지 모른다.
소설가 강석경이 '숲속의 방'(1985) 이후 37년 만에 세 번째 소설집 '툰드라'(강)를 펴냈다. 한 세기가 바뀌는 세월 동안 뜸 들여 발표해온 단편들을 묶어낸 소설집이다. 구도의 길을 가는 예술가와 제도에 저항하는 반체제 기질의 열정을 소설에 녹여온 그는 이번 소설집에 등단 50년 차에 이르는 동안 추구해온 생각들을 압축해냈다.
'생은 인연의 허무가 대기하고 있는 정류장들의 노선'이라는 문장은 눈 덮인 이끼의 평원을 묵묵히 순록처럼 걸어오지 않고서는 길어낼 수 없는 절창이다. 그가 꿈꾸어 온 '인연으로부터의 자유'는 제도의 폭력에 저항하는 몸짓이기도 했다. 돌아보니 소설 속 인물들이 걸어온 길, 걸어갈 길이 모두 '툰드라'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이래 30년째 살고 있는 고도 경주에서 그가 전화를 받았다.
"툰드라는 수만 년 지속된 기나긴 길인데, 순록이나 사양소가 이끼를 찾아 끝없이 떼로 몰려가잖아요. 수만 년 그 길을 오가는 행렬에 인류의 DNA가 묻어나는 거 같은 시에서 많은 걸 받았어요. 그동안 써 온 단편들에 한결같이 생의 고난과 동토가 보이더군요. 누구에게나 다 그런 동토의 시기가 있잖아요?"
강석경은 허연의 시집 '오십 미터'에 수록된 '툰드라'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종(種)' 순록 떼, 내게 탄식과 환희를 동시에 주었던 이 시"를 소설에 인용하며 "우리가 만난 곳이 툰드라가 아니었나"라고 묻는다('보루빌에서 만난 우리'). 툰드라의 삶은 유목의 길이다.
표제작의 화자 '주영'은 "난 자신과 맞지 않는 토양에 잘못 떨어진 씨앗"이라면서 "그게 내 업"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숲속의 방'에서 어디에서도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생을 버린 '소양'은 '잘못 떨어진' 상징적인 강석경표 캐릭터였다. 소양의 후예들은 세기를 건너 뛰는 동안에도 강석경 소설의 여일한 인물들이었다. 이번 소설집에 등장한 중심 화자들도 대부분 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떠도는 이들이다.
첫머리에 수록된 표제작 화자 '주영'도 마찬가지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속 게스트하우스에서 그곳 남자의 딸을 낳고 돌아온 '주영'은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내다 인도에서 만난, 아내가 있는 친구 '승민'과 제도를 거스르는 만남을 지속한다. 소설은 주영과 승민이 몽골로 '작별여행'을 떠나, 그곳의 사람과 자연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영은 말한다.
-내가 결혼에 관심이 없는 건 자유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이 땅의 제도가 싫어서야. 한국에서 제도는 권력이야. …여자가 애를 낳는데 제도의 허락을 받아야 돼? 주어진 생명이야. 단독자로서 내 인생 책임질 거니 남들 걱정은 필요 없어.
"저는 정신적으로 디아스포라예요.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반체제적인 거죠. 장편 '가까운 골짜기'를 끝내고 떠난 인도 여행에서 너무나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한국에서 고통 받았던 게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 그걸 깨달은 거예요. 예를 들면 제도라든가… 한국에서 태어난 게 너무 억울한 거죠. 너무나 평범한 사람인데 나하고 안 맞는 땅에 태어나니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비본질적인 것으로 힘들었구나 싶었고, 지나온 고통의 시간이 낭비 같았어요."
강석경은 1990년 인도에 다녀온 뒤 '비본질적인' 것들의 실체에 눈을 떴고, 2014년에는 몽골 체류를 한 뒤 자연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체감했다. 그에게 몽골은 유목민의 본향으로 언젠가는 꼭 가봐야 할 영혼의 뿌리 같은 곳이었다. 그가 등단 50년째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소설은 예술가의 구도적 숙명과, 제도에 저항하는 것이 화두였다. 그는 몽골 초원에서 말들이 광활한 대지를 걸어가는 장면을 목격한 뒤 '해탈' 같은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하늘엔 어느새 노을이 깔려 있었다. 문득 고원을 향해 돌아 서니 고원 아래로 수십 마리의 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의 사랑을 받고 돌아오는 듯 평온한 귀가였다. 광막한 자연 속에 두 사람 빼고 인간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넓이를 잴 수 없는 하늘 아래 온통 말과 새들이 대지 위를 누비고 있었다. 더없이 완전한 풍경이었다. 낙원이 거기 있었다.
"예전에는 생에 바투 다가서서 혼자 싸우고 고통 받고 피 흘리고 그랬는데 이제 관전할 수 있는 거리가 생긴 점이 달라진 걸까요. 아, 그래 슬픔도 기쁨도 다 같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이렇게. 오래전 인도에서 '본질'을 봤다면 몽골에서는 정말 자연이 갖고 있는 어떤 자유 같은 걸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소설 말미에도 썼는데 그 장면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동물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걸 정말 그때 확실히 알았어요. 인간이 주인이 아니에요. 해탈을 바란 적은 없지만 그래서 해탈 상태가 어떤 거라는 걸 알겠더군요."
'삼십여 개국 사람들이 인습이나 고정된 규율에 매이지 않고 국적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산다'는 인도 남부 생태공동체 '보루빌'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십 문턱에 화자는 그곳을 찾는다('보루빌에서 만난 우리'). 인간에게 덧없이 의존하지 말고 이념의 공동체를 둥지로 삼으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누군가는 떠나간 정부 집에 불을 지르고 누군가는 본국에서 편지 한 통 받고 부엌 천장에 목을 매기도 했다. 인간도 이념도 덧없다면 어디에 기대어 살아갈까. 강석경은 "파악할 길 없다"면서 "묵묵히 순록들처럼 사양소들처럼 주어진 조건에서 그저 묵묵히 그렇게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우고 멸하는 것도 '가득히 비워지는' 역설에 가까워지는 구도행이다. '가멸사'에 등장하는 화자는 "숲의 규칙이 있는데 잎의 십 프로는 숲속 다른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만든다"면서 "인간도 지구에 사는 대가로 가슴을 갉아 먹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무심한 천지가 준 내 업이려니 하면서 분노도 자책도 다 가을잎처럼 털어 묻고 그 고통의 몫 이십 프로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이 단편 제목 '가멸사'(加滅寺)는 '멸하라'는 의미의 작명이다. '발 없는 새'에서도 죽음 직전까지 끌어안은 책들을 놓지 못한 노학자를 등장시켜 '하나씩 하나씩 지워가는' 삶의 자세를 성찰한다. 그렇게 하나씩 멸하다보면 이승에서 지은 '인연'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까. 강석경은 중국으로 떠난 '오백 마일'의 화자 '인영'의 상상을 빌려 말한다.
-인영이 뒷날 하고 싶은 일은 가난하나 아름다운 남인도 평원에 통나무로 게스트 하우스를 짓는 일이다. 오는 사람 맞고 가는 사람 떠나보내며 무심히 게스트 하우스 주인으로 늙어가는 것. 젊은 인영은 여행지에서 느닷없이 그런 상상을 했다. 아무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되고 싶다고. 속세의 절간 같은 상상의 게스트 하우스 이름은 '인연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짓자.
이번 소설집에는 이 밖에도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 '기나긴 길' '석양꽃' 등 8편이 수록됐다. '청색시대' '가까운 골짜기'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미불' '신성한 봄' 등 주로 장편에 집중해온 강석경에게 단편은 '손 풀기'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는 "장편소설에 대한 꿈은 아직 놓지 못하지만 소설집은 이로써 마지막 출간이 될 것"이라며 "수정 작업으로나마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5년 단위로 남은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한 뒤로는 걸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언젠가는 툰드라의 길도 끝이 보일 것이다.
오래전 배운 재주 그대로/ 그들은 눈발을 건넌다/ 한지 위에 떨어뜨린 핏방울처럼/ 그들이 찍어놓은 방점은/ 질기게 이어진다.// 뭔가 새로운 일이 있을 거라고/ 내일을 기원하던 웅성거림이 모여/ 수만 년이 흘렀다.// 그들은 호르몬에다/ 한을 새겼지만/ 신은/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툰드라.
_허연, '툰드라'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