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인터·하림 팬오션, 우크라·미국에 각각 곡물 터미널 운용
우크라이나·미 서부 유통시설 확보…현지서 매입해 세계로 판매
포스코인터 "비상시에도 수입 가능토록 우크라 정부와 합의했다" ▲ 우크라이나 남부 미콜라이우 시 외곽에 위치한 포스코인터 곡물 수출 터미널. [포스코인터 제공] 지난 4월3일(현지시간) 러시아 군은 순항미사일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남부 미콜라이우 시 외곽을 공격했다. 인구 50만 미콜라이우시는 우크라이나 군이 탈환을 노리는 요충지 헤르손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2014년 러시아가 강제 합병한 크름 반도와는 직선거리로 약 150㎞ 떨어져 있다.
외신들은 이날 공격으로 곡물저장고가 폭파됐다고 보도했지만, 당시 여러 소식을 종합해 보면, 러시아군 목표물은 군수 시설(장갑차 수리공장)이었다. 러시아군 공격으로 인근 다국적 곡물메이저 벙기(Bunge) 소유 수출 엘리베이터는 샤일로(저장탱크) 한 개가 파괴되는 등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2019년 2월 지어진 포스코인터내셔널(포스코인터) 수출 터미널이 있다. 다행히 포스코인터 시설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회사 관계자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출 터미널'이라고도 불리는 수출 엘리베이터는 대량 곡물을 배로 실어 나르는 운송 시설이다. 곡물 유통의 핵심 시설이다. 현지에서 싼값에 사, 대량으로 보관하다 값이 오르면 내다 파는 일종의 곡물 도매상이다.
아무나 할 수도 없다. 공급처와 수요처가 잘 닦여 있어야 한다. 운송 기반시설도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수출 터미널은 운송선 입출이 가능한 항구 주변에 위치해 있다. 이밖에 하역을 위한 대규모 컨테이너도 필요하다.
곡물을 무작정 사들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매수·매도시기에 따라 값을 얼마로 책정 하느냐도 관건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노하우가 필수다. 이 분야에서 곡물메이저가 시장을 석권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곡물메이저 뒤를 쫓고 있는 것이 일본 기업이다. 글로벌 종합상사 중에선 이토추(伊藤忠), 마루베니(丸紅), 스미토모(住友), 미쓰비시(三菱) 등 일본기업들이 선두주자다. 일본 종합상사들은 평상시에는 곡물 트레이딩을 통해 돈을 벌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비상시 식량안보 수단으로도 쓰인다. 일본은 일찍부터 농림수산성(우리나라 농림축산식품부)·젠노(全農·우리나라 농협과 유사한 조직)·민간이 '삼각편대'를 이뤄 식량안보에 입체적으로 대처해왔다.
포스코인터, 우크라이나 기업 오렉심그룹 지분 75% 인수
포스코인터 우크라이나 수출 터미널은 해외 곡물 유통에 나선 우리 기업들에게 기념비적인 시설이다. 국내 대형종합상사 포스코인터는 2019년 2월 우크라이나 곡물·유지류 유통기업 오렉심그룹(Orexim Group)이 갖고 있던 지분 75%를 인수하면서 국제 곡물유통시장에 뛰어들었다.
우크라이나 수출 터미널에는 밀, 옥수수, 콩 등 주요곡물을 최대 22만 t 가량 저장할 수 있다. 산지에서 생산된 곡물을 싸게 사들여 비축해뒀다가 EU(유럽연합), 중동, 북아프리카 등지에 내다 팔아 이익을 내는 방식이다. 포스코인터에 따르면, 전쟁만 터지지 않았어도 목표치인 연간 250만 t 처리는 충분히 가능했다. 완공 후 처음 유통을 시작한 지난해에는 120만 t을 처리했다.
포스코인터가 곡물 유통 사업을 검토한 것은 2015년 무렵이다. 2000년 들어 세 차례 애그플레이션(급격한 곡물가 인상이 소비자 물가에 영향을 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정부와 관련 기업들 사이 식량안보가 큰 화두가 됐다. 여동윤 포스코인터 식량자원개발1그룹 리더는 "곡물 유통업은 사업 특성상 다른 분야에 비해 마진율이 크지 않다"면서도 "제철보국(製鐵保國)이라는 포스코 설립이념에 부합할뿐더러, 식량안보 대응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판단해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남부 미콜라이우 시 외곽에 위치한 포스코인터 곡물 수출 터미널. [포스코인터 제공] 같은 흑해를 끼고 있는 오데사 항(港)은 일부 물량에 한해 수출이 재개됐지만 미콜라이우 항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데사 항과 미콜라이우 항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양대 축이다. 바다가 막히면서 포스코인터는 육상운송으로 바꿨다. 기차를 통해 곡물을 내다 파는데, 판매량도 제한적일뿐더러, 운송비도 바다를 이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든다.
식량안보 차원에서 포스코인터는 전체 유통물량 10%를 한국으로 보낸다는 계획이다. 국제곡물가가 치솟고 세계 주요 생산 국가들이 수출 금지 조치에 나서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할까.
식량안보 회의론자들은 "최악의 식량난이 벌어지면 해외에다 아무리 안전한 공급루트를 확보했다고 해도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다"며 식량안보 대비 자체에 소극적이다. 그보다는 지금처럼 외교적으로 우리와 관계가 좋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값싸게 들여오면 된다는 논리다. 익명을 요구한 한 포스코인터 관계자는 "(유사시 곡물 조달은) 투자 때부터 우크라이나 정부와 어느 정도 협의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포스코인터가 우크라이나를 투자처로 삼은 것은 다국적 곡물메이저와 일본 종합상사들 진출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다. 여동윤 리더는 "기회가 되면 식량 밸류체인(공급가치 시스템) 확보 및 조달 안정성 차원에서 우크라이나는 물론 다른 지역으로 투자를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팬오션, 번기 손잡고 미국 워싱턴주 롱뷰항에 건립
포스코인터보다 앞서 2009년 6월에는 옛 stx그룹 계열사인 stx팬오션(현 하림그룹 계열사 팬오션 전신)이 미국 워싱턴주 롱뷰(Longview) 항에 있는 수출 터미널 EGT(Export Grain Terminal)에 합작 투자했다. 현재 팬오션이 보유한 지분은 36%다. 나머지 지분은 번기가 갖고 있다. 138에이커(약 56만㎡) 저장 용량을 갖고 있는 EGT는 연간 900만 t 곡물을 처리한다. 이를 위해 저장탱크, 철도 선로, 부두, 하역설비 등을 갖추고 있다.
초기에 번기 북미법인과 이토추 북미법인 자회사 이토추 인터내셔널이 함께 했지만, 2020년 팬오션은 이토추 인터내셔널 지분을 전량 매입했다. 1818년 설립된 번기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본사를 둔 다국적 곡물회사다. 수출 터미널, 저장고 등을 포함해 전 세계 350여개 다양한 곡물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미 워싱턴 주 롱뷰 항에 들어선 곡물 수출 터미널 EGT는 연간 900만 t을 처리한다. 하림 계열사 팬오션은 현재 이 회사 지분 36%를 갖고 있다. [EGT 홈페이지 캡처] 롱뷰 항은 미 북서부 곡물수출의 전략 항이다. 이곳에서 곡물을 실은 수출 화물선은 워싱턴주와 오리건주 경계선인 컬럼비아 강을 타고 태평양으로 빠져나와 아시아, 남미로 간다. EGT는 옥수수, 밀, 콩 3대 주요 작물을 모두 취급한다.
미 북서부 곡창지대인 몬태나 주에서 수확한 곡물을 신속하게 실어 나르기 위해 EGT는 몬태나 주 카터·체스터·시드니 등에 산지 엘리베이터 4개를 마련했다. 여기서 100량 규모의 6대 수송열차를 통해 다양한 곡물이 EGT로 모인다.
100량 규모의 곡물 수송열차에 실린 곡물을 저장 창고로 실어온 곡물을 옮기는 데만 5시간 걸린다. 시간 당 12만 t의 곡물을 옮겨 담을 수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올해 목표로 정한 전체 우리밀 수매량이 1만7000t인 것은 감안하면 엄청난 처리속도다.
EGT는 곡물 운송 외에도 기후 정보, 곡물 수출과 관련한 마케팅, 곡물가 전망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팬오션 관계자는 "EGT 투자로 옥수수 위주였던 곡물 포트폴리오가 다변화된 것은 큰 성과"라면서 "이외에도 4대 곡물메이저 중 한 곳인 번기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곡물 유통기업으로서 전문성을 확보하게 된 것도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