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다짐대로 생의 '마지막 순간' 보내고 간 이어령
조성아
jsa@kpinews.kr | 2022-02-27 16:34:05
아들 이승무 교수 "죽음과 흥미로운 대결을 한번 해보시는 듯…"
"나는 늘 밤을 부엉이처럼 뜬눈으로 지새워요. 이젠 어둠과 팔씨름을 해도 초저녁부터 져요. 빛나던 단추를 모두 뜯긴, 패전 장군의 군복 같은 수의를 입어야지요.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어 죽어도 그 입술에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을 겁니다."
지난 26일 별세한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이 '마지막 인터뷰'를 나눈 기자(조선비즈 김지수)에게 지난해 말 보낸 문자다. 김 기자는 1년 여간 이 전 장관과 나눈 인터뷰를 지난 해 10월 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으로 펴냈다.
이 전 장관의 아들 이승무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가 전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본인의 다짐 그대로였다. 이 교수가 전한 고인의 마지막은 이러했다.
"허공을 아주 또렷하게 30분 정도 응시하시더라. 마치 아주 재미있는 걸 지켜보시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황홀한 얼굴이었다...마치 죽음과 흥미로운 대결을 한번 해보시는 듯하다가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
이 전 장관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신의 존재를 느꼈다"고 말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한밤중에, 새벽 3~4시에 가장 아파요. 그때 나는 신의 존재를, 은총을 느껴요. 고통의 한가운데서 신과 대면해요. 동이 트고 고통도 멀어지면 하나님도 멀어져요. 조금만 행복해도 인간은 신을 잊습니다(웃음)"라고 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딸 이민아 목사가 투병 중 시력을 잃어가던 2007년 세례를 받았다.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그는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고백했다. 고인의 장녀 이민아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지역 검사를 지냈다가 2012년 위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고인이 남긴 수많은 성찰과 지성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 전 장관은 "AI가 아니라 AW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그는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니라 AW(Artificial wisdom)이죠. AI로 전쟁 무기를 만들었다면 AW로는 행복의 무기를 만드세요.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잠들어도 한 몸처럼 느끼는 AW 베개를 만드세요. 서양 사람은 기껏해야 깃털 베개 만들었지만, 우리는 조 넣고 콩 넣어서 바이오 베개 만든 민족입니다. 조상 중에 아인슈타인도 퀴리 부인도 없지만, 지혜와 멋이 배인 생활의 역사가 있어요"라 말했다.
이 전 장관은 2006년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디지로그'라는 개념을 만드는 등 기술 발전에 대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시대를 앞서갔다.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는 27일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정치권에서는 김부겸 국무총리와 이홍구 전 국무총리 등이 빈소를 방문해 유족들을 위로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 문화 발전을 이끈 고인의 공로를 치하했다.
황 장관은 "제가 장관에 취임한 후 가장 먼저 찾아 뵌 분은 이 전 장관"이라며 "투병 중인 힘든 상황 속에서도 1시간을 넘게 함께해주셨다. 여전히 반짝이셨던 눈빛과 그 열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날 제게 해주셨던 소중한 말씀은 고인의 유지처럼 다가왔다"고 회상했다.
KPI뉴스 / 조성아 기자 jsa@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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