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품 하나에 피아니스트 꿈 접고 갤러리스트의 길로
올해로 40주년…제임스 터렐·백남준·김환기 등 명작 빼곡
"디지털이 큰 변화의 물결이지만 아날로그도 힘 잃지 않을 것"▲ 백해영 관장 [백해영 갤러리 제공] 예술은 하나로 통하는 것일까. 우연히 마주친 미술 작품 한 점이 피아니스트를 꿈꾼 한 예술가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해외여행도 할 수 없었던 1982년, 풍운의 꿈을 품은 백해영은 美 NYU로 향했다. 꿈을 좇던 1985년 어느 날. 우연히 찾은 뉴욕 소호의 한 갤러리에서 운명의 신과 마주했다. 선을 활용한 '엘리워스 켈리(Ellsworth Kelly)' 작품 앞에 선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날의 운명적 조우는 백해영을 '갤러리스트의 길'로 이끌었다. 이렇게 시작한 '백해영 갤러리'가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화려하고 긴 이력만큼이나 갤러리 수장고엔 국내외 현대미술 명작이 빼곡하다. 백 관장은 "올해 미술시장은 낙관적이지만 기회를 잘 살려야 하고 디지털 분야는 건강한 방향으로 나가게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백전노장 백해영 관장을 만났다.
'백해영 갤러리'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수십 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얗게 칠한 건물 외관은 한 장의 캔버스 같다. 대문 한편에 걸린 '77'번지 팻말은 뭔가 행운을 부를 것만 같다. 내부에 들어서자 층마다 여러 개로 나뉜 전시 공간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날은 두 돌을 맞은 'SWITCH ART MARKET展'이 열리고 있었다.
차 한잔을 나누며 시작된 인터뷰. 백 관장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뉴욕 소호의 한 갤러리를 모티베이션 삼아 1988년에 이곳에 백해영 갤러리를 오픈했어요. 처음엔 장소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10여 년 살던 주택을 개조했죠. 주택을 활용하니 생활 공간에 어우러진 미술 작품을 실감 나게 보여줄 수 있어 이점이 많았어요."
처음부터 이름난 '갤러리스트'는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작품을 좋아하는 콜렉터였다"고 했다. 마음에 꽂힌 작품을 하나둘 구매하면서 미술공부에 빠져들었고, 해외 유명 갤러리와 교류로 시야도 넓혔다고 한다. 백 관장은 "해외 거장들과의 국제 교류전시회도 열며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면서 "신기한 것은 미술 분야는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고 했다.
▲ '빛의 아티스트'로 불리는 미국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작품 'Installation'. 빔프로젝트로 쏘아진 빛이 만든 환상의 실체에 관객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백해영 갤러리 제공] '백해영 콜렉션'은 오랜 활동의 결과물이다. '빛의 아티스트'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국내 최고가 작가' 김환기의 작품 등 국내외 걸출한 명작이 그의 콜렉션에 담겼다.
백 관장은 국내외 여러 전시를 열어왔지만, 2020~21년에 연 '백남준의 파르나스展'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파르나스는 독일의 부퍼탈(Wuppertal)에 있는 갤러리예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인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 열린 곳이기도 하죠. 2020년 '파르나스展'에선 이런 백남준의 초기 '아카이브'부터 1990년대 이후 탄생한 그의 여러 작품을 선보였어요. 이듬해엔 문화도시를 꿈꾸는 고향 목포에 자비를 들여 이 전시회를 열었구요. 오래전 떠나온 고향에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백 관장의 기획은 때론 엉뚱하리만큼 독창적이다. 2021년 11월 '백해영 갤러리 평창'에서 연 '오대산 예술 오두막 프로젝트(오예오), 'Ecological Activist'가 그렇다. 이 전시회는 세계적 거장 '요셉 보이스(Joseph Beuys)展'이었다. 요셉 보이스를 오대산 자락에서 만날 수 있다니 그저 놀랄 일이다. 백 관장은 "팬더믹 이후 전시 방향을 고민하는 자리였다"며 "향후 미술의 주요 전시 주제는 생태, 기후, 환경 문제"라고 했다. "누가 오고, 안 오고 보다는 미래 화두를 꺼낸 자리라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백 관장은 해외 시장에 유망한 국내 작가를 알리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세계 유명 미술품 경매회사인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에 김강용, 곽훈, 강익중 등 10여 국내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백전노장이 보는 올해 국내 미술시장은 어떨까.
"올해는 세계 3대 아트페어인 영국 프리즈(FIREZE)와 국내 최대 규모 키아프(KIAF SEOUL)가 함께 열리죠. 함께 열리는 키아프플러스(KIAFPlus)에선 NFT아트, 뉴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장르가 폭넓게 소개됩니다. 큰 장이 열리니 자연스레 한국시장이 주목받을 거예요. 새로운 콜렉터도 늘어날 테니 여러모로 좋은 기회죠. 모두가 힘을 모아 이런 긍정적 상황을 잘 살려야 합니다."
▲ 권정은 아트딜러(왼쪽부터), 김형순 오마이뉴스 문화부기자, 백해영 관장이 전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해영 갤러리 제공] 현재 진행 중인 'SWITCH ART MARKET展'에 대해서도 물었다. "팬데믹을 함께 극복하고 재발견하자는 취지입니다. 누구나 쉽게 작품을 즐기고 찾는 장을 만들고 싶었죠.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작가들과 함께했어요. 김병관, 박효진, 조혜경, 이샛별, 류승환, 김경옥, 주원영, 홍미희, 서희정 작가가 그들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유망한 작가들을 세계 시장에 알리는 데 힘을 쏟으려 합니다."
백 관장은 '콜렉터'를 위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모든 관계가 그렇지만 미술 분야는 특히 신뢰가 중요합니다. 작가나 갤러리와 오랜 시간 신뢰를 바탕으로 교류해야 하죠. 맹목적인 추종도 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꾸준한 미술공부가 필요해요. 결국, 서두르지 말고 긴 호흡을 가져야 합니다. 나도 조용익, 백남준, 김강용 등 여러 작가와 오랫동안 교류하며 그들의 작품을 지켜봤어요."
해외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기회가 된다면 해외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견문을 넓혀야 합니다. 루부르 아부다비 쟝루벨 (LOUVRE Abu Dhabi Jean Nouvel),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Bilbao Guggenheim Museum), 테이트모던 (Tate Modern Museum), 나오시마 베네세아일랜드 (Naosima Benese Island), 니가타 트리엔날레 제임스 터렐관(Niigata Triennale James Turrell Hall) 등이 가볼 만한 곳이죠."
관심사는 최근 대세로 떠오른 'NFT미술'로 옮겨갔다. "이젠, 미술과 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죠. NFT미술은 여러 논란의 중심에 있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NFT미술이 시장 활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백 관장은 그러면서도 "많은 이가 모든 것이 디지털로 향할 것으로 예측하지만 그건 무리한 생각"이라고 했다. "큰 변화의 물결은 맞지만, 아날로그도 결코 힘을 잃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백 관장은 "예술가라면 반드시 아날로그 즉, 오프라인의 중요성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궁극의 질문. 미술은 무엇인가. 백 관장은 "미술의 다른 말은 힐링"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마주친 운명의 신도 어쩌면 힐링의 신이었을지 모른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