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살고, 살아남기 위해서 산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2-01-21 08:21:30

서울대 강의록 '왜 읽는가' 펴낸 문학평론가 서영채
읽는 행위는 마음으로 쓰는 행위, 교감이 전제돼야
사랑과 혁명이라는 두 가지 '불륜', 근대소설의 핵심
'교양 없는 괴물'보다 '교양 속물'이 그리운 시대
'허망함' 파고들어 형이상학적 힘 키우는 집단 경계

이른바 '세계 명작'은 왜 읽는가. 수많은 볼거리와 쾌락을 제공하는 읽을거리가 차고 넘치는 판에 왜 굳이 지난 세기, 혹은 이 시대의 진중한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 하는가. 문학은 현란한 디지털 세상에서 더 이상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여전히 붙들어야 할 인문학이 맞는가. 문학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과 더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까지, 문학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 역사 언어학 등을 함께 동원해 명석하고 친절하게 설파하는 책이 출간됐다. 

▲서울대 교양학부 학생들 대상으로 진행한 '동서양 명작 읽기'를 책으로 펴낸 문학평론가 서영채 교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문학평론가 서영채 교수(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가 펴낸 '왜 읽는가'(나무나무출판사)가 그것이다. '서울대 교양강의 동서양 명작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서 교수가 서울대 교양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의(2016년 2학기)를 녹음해 풀어낸 것으로, 이 강의는 이후 학생들의 높은 호응에 힘입어 4년 동안 지속됐다. 문학 전문집단이 아닌, 교양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최대한 쉽게 풀어서 문학 인접 학문을 해박하게 곁들여 삶의 자료로 문학을 풀어낸다.

동서양 명작 11권을 텍스트로 동원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 '토니오 크뢰거'(토마스만), '적과 흑'(스탕달),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 '마담 보바리'(플로베르), '호밀밭의 파수꾼'(샐린저),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나, 제왕의 생애'(쑤퉁), '열쇠'(다니자키 준이치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그 남자네 집'(박완서)이 그 목록이다. 서 교수가 이 강의에서 쏟아낸 말들은 학생과 일반 대중 독자는 물론,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도 읽고 쓰는 행위를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용하고 흥미롭다. 눈이 내리는 날 서울대 관악 캠퍼스 서영채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외국문학과 국문학이 칸막이가 돼 있는 강단현실에서 비교문학이라는 틀을 동원해 동서양 텍스트를 넘나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지방에 내려가 공대생들을 대상으로 문학 강연을 한 적 있다. 들을 준비가 돼 있는 너무나 우호적인 청중들인데도 한 10분쯤 이야기하다 보니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이 만들어지는 경험을 했다. 학생들 책임이 아니라 순전히 내 책임이라는 반성을 했다. 그때까지는 그냥 문학 전문가로서 이야기를 해왔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문학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통할만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정 작품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서 문학을 인문학 차원에서 폭넓게 접근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문학의 위상이 예전과 다르고 형식과 수용방식도 달라지고 있는데 전통적인 접근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가?
"이제 사람들은 문학이 당연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을 인문학 차원에서 이야기해야 되는 시점이다. 소설이나 시의 수사법 같은 전통적인 문예학의 지식은 사실 한줌밖에 안 된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문학을 우리 삶의 자료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접근해야 한다. 인문학이 그동안 언어 역사 철학에서 축적해온 지식들을 풍성하게 겹쳐 놓으면서 문학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1층에서만 운위되는 문학을 인문학 2층의 담론으로 이야기하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도 소통할 수 있는 장들이 열리지 않을까."

서 교수는 "명작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사실은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쓰고 있었던 거"라고 강의에서 말한다. 읽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이 투여되면서 텍스트와 교감하는 행위는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맥락이다. 다만 손으로 그 생각을 옮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읽는 사람이) 텍스트의 생산자라고 말했던 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문자 그대로 생산자예요. 무엇의 생산자? 자기 서사의 생산자! 자기 서사는 한 사람에게서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복사본과 수정본이 계속 겹쳐요. 차이가 만들어져요. 차이는 본이 있어야 생겨나는 거지만, 진짜 본은 복사본과의 차이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야 분명해져요. 수정본이 나와야 원본이 제 모습을 드러내요." 그는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서사를 확인하는 행위"라면서 "모든 사람은 자기 몸과 행동으로 자기 고유의 서사를 써나가는 소설가"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건 읽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썼다. 어떻게 읽어야 하나.
"최근 어이없는 경험을 했다.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이라는 굉장히 두꺼운 책을 몰두해서 읽다가 2권 절반쯤 넘어갔을 때에서야 읽었던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읽고 나서 한 줄도 메모를 하지 않았으니 안 읽은 거다. 텍스트와 교감한 흔적들이 남아야 그게 읽은 거지, 눈이 쓱 활자를 스치고 지나가면 읽은 게 아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나와 있는 이야기들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읽고 네 얘기를 하라고 주문했다. 이제 증상을 한 번 읽어봐라.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목들, 인물들이 왜 이렇게 행동을 했을까,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이 인물은 왜 이런 모양일까,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은데 책을 읽다 보면 툭툭 걸리는 대목들이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그 책을 덮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것이 '텍스트의 증상'이다. 텍스트는 작품 자체를 일컫는 용어가 아니다. 작품은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고, 읽는 사람이 자기 생각을 투여해 증상을 느끼고 새롭게 직조한 직물, 그것이 '텍스트'인 것이다."

-단순히 '넓고 얕은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독서는 '교양 있는 속물'들의 행위인가. 
"니체의 시선으로 보자면 '위생처리가 잘된 장식품이나 완구 같은 지식, 무서운 진리를 대체해버린 편안하고 건전한 지식이 이른바 교양이라는 것'이고, '진정성 없는 싸구려의 세계'에 사는 이들이 '교양 속물'이다. 이 단계도 넘어서 이제는 괴물의 시대가 되는 거 아닌가 싶다. 그전에는 교양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약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차라리 교양 없는 괴물보다는 교양이 있는 속물이 더 나은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연구실에서 만난 서영채 교수. 그는 "이전 시대에 문학이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이제는 깊이를 일구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근대적 서사체'로서 소설이 다루는 것은 두 가지 '불륜'으로 요약된다는 논리도 흥미롭다. 그는 결혼이 '짝짓기'라면 진짜 사랑은 '불륜'이라고, 혁명도 또 하나의 불륜이라고 말한다. "불륜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규정하는 것이 공동체의 질서, 곧 륜(倫)입니다. 윤리이기도 하고, 도덕이기도 하고, 인륜이기도 해요. 공동체의 질서란 공동체 자체의 안위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순간 발생하는 격렬한 마음의 동요, 거기에 실재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사랑이 있어요. 그러니까 진짜 사랑은 바로 그 질서라는 장벽을 돌파하는 순간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죠. 그것을 기록한 게 곧 소설입니다. 소설이 잡아내는 또 하나의 불륜은 공동체의 질서 자체를 파괴하고자 하는 힘입니다. 현실 세계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 곧 혁명입니다."


-근대적 서사체로서 소설이 다루는 것은 사랑과 혁명이라는 두 가지 불륜이라고 요약하는 건 너무 단순화한 논리 아닌가?
"선정적일 수도 있는데, 사실 그런 게 핵심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라는 게 본디 보통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좀 특별한 사람들 이야기인데, 특별한 이야기가 그 두 가지밖에 더 있는가? 우리 삶에서 사고치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사고를 치느냐, 제도에 반항하면서 공동체의 '륜'(倫)을 어기는 혁명이라는 사고를 치거나, 자기 마음에 충실해서 사랑이라는 사고를 치느냐의 문제다. 사실 선학들과 고승대덕들께서 이미 했던 말씀이다. 프로이트 같은 사람은 우리는 모두 사랑하기 위해서 살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 산다고 했다. 살아남는 방식이 혁명의 방식이고, 그것 이외의 모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그러니까 비이성적인 그런 것들은 다 사랑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이것저것 따져서 계산하는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짝짓기의 영역이고, 그 짝짓기 바깥에 도저히 짝 지을 수 없는 사람들과 짝을 짓는 사람들, 그걸 보통 사람들은 불륜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거기서 핵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힘을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얘기를 한 거다."

-웹툰과 웹소설이 젊은 독자층을 사로잡고 있다. 전통적인 맥락의 문학, 삶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문학이 희미해진 시절이다.
"웹소설들 중에서도 살아남는 명작들이 나올 것이다. 보편화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보면 깊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드라마도 어느 순간 깊어지지 않던가. 우리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이라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이전에는 현실을 바르게 만들어야 된다는 맥락에서 문학이 마치 언론과 같은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졌는데, 1990년대 이후로 그건 문학의 일이 아니게 됐다. 이제는 오히려 대중문화의 여러 장르들이, 특히 드라마나 영화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문학은 이제 깊이를 향해서 가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 시대나 현실 비판, 이런 거보다는 원래 그 뒤편에 있는, 2층이나 지하에 있는 깊이를 문학이 감당해야 될 때라고 본다."

▲서영채 교수는 "민주주의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힘을 지닌 집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교양으로 내면의 근력을 강인하게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서영채는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1994~2015)으로 20년 넘게 일하다가, 신경숙 표절 파문으로 촉발된 문학권력 비판에 직면해 편집위원들이 모두 물러날 때 함께 떠났다. 그는 "좀 더 일찍 그만두었어야 했다"면서 "처음 시작할 때는 내부자가 아니었는데 밖에 나와서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바깥의 시선으로 한국문학을 보게 되면서 내부자가 맞았구나 싶은 깨달음이 왔다"고 술회했다. 그는 이어 "시대정신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진영 논리로 갈라져 있던 문학판에서 새로운 문학에 기여한 건 긍정적인 역할이었다"면서 "20년 동안 나름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하려고 노력을 했고, 흠도 많았지만 보람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신대 문예창작과에서 하버드대를 모델로 삼은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로 교직을 옮긴 이후로는 주로 공부와 강의에 집중하면서 '풍경이 온다' '인문학 개념정원' 같은 저술들로 독자들을 만났다. 이즈음은 '동아시아 근대문명'에 관한 저작을 향해 매진하는 중이다. 문학을 중심으로 세상을 폭넓게 사고하는 인문학자인 그가 바라보는 작금 한국사회는 어떠할까. 연구실을 나설 때 눈은 그쳐 있었다. 

"사실 무속이나 종교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인데, 그것들이 도사 법사 부흥사 목사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췄을 때 저렇게 무시무시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을 한다. 문학이 비판적 지성의 몫을 감당하던 시절에 적은 권력이었다. 지금 제일 무시무시한 적은 삶의 허망함을 파고드는 형이상학적 힘을 지닌 집단이다. 민주주의적 힘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 종교심의 영역 아닌가. 집단화된 종교심의 영역이 사회적인 힘으로, 현실적인 힘으로 드러나는 건 정말 문제다. 각자 개인의 힘으로, 교양의 힘으로, 내면의 강인한 근육을 키워나가야 한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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