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작가가 집필한 '세계 최초' 장편소설 첫 선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1-08-26 08:39:14
'소설다운 최초 AI소설' 표방한 '지금부터의 세계'
"소설-쓰기의 시대가 아닌, 소설-연출의 시대"
인공지능(AI)이 이제 예술의 영역, 그 중에서도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섬세한 사유가 집적되는 문학까지 장악할 수 있을까. 소설가 김태연(61)이 '비람풍'이라고 명명한 'AI작가'를 지휘 감독해 장편 '지금부터의 세계'(파람북)를 펴냈다.
AI에 기반한 소설은 2008년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일본에서는 AI단편이 2016년 문학상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올랐고, AI 시집(2017)도 중국에서 출간됐다. 2018년에는 사람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AI소설 '1 the Road'가 나왔고 한국에서도 AI엽편소설들이 생산됐다. 이번 AI 소설 제작팀은 "이전까지의 작품은 단지 AI가 창작했다는 것이 독서 포인트였지만 서사다운 서사를 갖춘 장편 소설로는 세계 최초"라고 밝혔다.
다섯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지체장애인 아마추어 수학자, 수학과 교수이자 벤처 사업가, 정신의학과 의사, 천체물리학자, 불문에 귀의한 승려가 각자의 자리에서 존재의 비밀을 탐구한다는 얼개다. 수학과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이 지나치게 많을 만큼 현란하게 삽입된다. AI의 학습역량이 아니면 쉬 따라잡기 힘든 대목이다.
이번 소설을 집필한 AI 작가는 "문장력은 사실상 거의 교정을 보지 않아도 될 수준"으로 "깔끔하며 제법 기교를 부리기도 한다"고 출판사측은 밝혔다. "문체도 어느 정도 완벽하진 않지만 구현이 가능한 수준"인데 "무엇보다 세부 디테일을 학습된 '지식'에서 끌어오는 수준이 대단하다"는 평가다.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부터의 세계'를 기준으로 "앞으로 남은 것은 소설을 구상하고 자율적으로 창작하는 AI뿐"이라는 주장이다.
소설쓰기에 적용된 AI 메커니즘은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인공지능의 엔진 역할을 하는 '나매쓰', 실제로 소설을 쓰는 '다품다'가 두 개의 축이다. 완성된 설계도에 따라 설정을 입력하면, 이 논리적 기계장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주제와 소재, 배경과 캐릭터를 설정하고 스토리보드를 담당하는 건 인간의 몫이다. 이야기의 도입부와 서문, 후기 등 부속물을 쓰고, 결과물을 정리하는 작업도 담당했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김태연은 자신은 이번 소설에서 영화처럼 '감독'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영화감독을 상상해 보세요. 스토리보드를 짜고 소품을 준비한 다음 정해진 촬영장소에서 픽업한 배우들에게 연기를 주문하며 스텝들에게 세부적인 '오더'를 내리지 않나요. 소설감독이 하는 일도 비슷합니다. AI 작가가 집필할 환경을 마련한 다음, 명령을 내리고, AI 작가의 결과물을 확인하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명령을 조정한 다음 다시 촬영합니다. AI 작가에게도 명령을 내린 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러번 반복해서 과제를 새롭게 부여합니다."
김태연은 연세대에서 신소재공학을 전공하고 국문학을 부전공했으며 장편 '그림 같은 시절', 실명소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등을 출간한 소설가. 그가 이번에 데뷔시킨 AI작가 '비람풍(毘嵐風)'은 우주가 만들어질 때나 파괴될 때 휘몰아친다는 폭풍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문학사에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김태연은 "명심해야 할 것은 AI의 능력은 오직 감독의 역량에 의해 결정된다"면서 "이제 소설-쓰기의 시대가 아닌, 소설-연출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밝혔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