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직설] '피 맛' 언급한 김의겸 의원에 실망했다
UPI뉴스
| 2021-05-21 08:30:08
청문회와 언론보도 개혁 방안 제시했어야
"초면에 곧 출신 고교를 알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만나더라도, 그 몇 학교 출신 '엘리트'들은 20분 안에 은근히(!) 자신의 출신 고교를 밝힐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지요. 모든 화제를 고교 동창으로 연결하는 능력은 서커스단의 묘기 수준입니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가 십수년 전 어느 신문 칼럼에서 한 말이다. 명칼럼이다. 지금 다시 읽어도 웃음이 나오니 말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여러 차례 했던 구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다. 1974년 고교 평준화 이후 세대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고교 입시전쟁에 참전했던 그 이전 세대에겐 전국 모든 고등학교의 최정상이었던 경기고의 명성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
김 교수가 이 칼럼에서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서열의식'의 극복이다. 그는 "'니들이 경기를 알아?'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엘리트 병은 문자 그대로 '질병'이므로, 그들도 희생자일 뿐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요"라면서 "그들의 무의식을 넘어 유전자에까지 자리 잡은 서열의식은 그들 자신과 우리 모두의 불행입니다"라고 했다.
새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최근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비판한 내용 중에 불편하게 여겨진 대목이 있어서다. 그는 "윤 전 총장이 5·18을 언급하니 젊은 시절 전두환 장군이 떠오른다"며 두 사람의 공통점을 거론했다. 윤 전 총장에게 '쿠데타'의 이미지를 씌우는 건 강성 친문 정치인들의 공통된 특성인지라 새로울 건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수의 민심과 잘 싸워보길 바랄 뿐이다.
내가 주목한 건 시험 성적에 관한 언급이었다. 김 의원은 전 전 대통령의 육사 졸업성적이 156명 중 126등을 기록한 것과 윤 전 총장이 9수 끝에 검사가 된 것을 비교하며 "둘다 사람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다"고 했다. 윤 전 총장을 비판하겠다고 들면 점잖게 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참 많을텐데, 사적인 술자리에서나 하면 어울릴 법한 말을 페이스북에 대고 해도 괜찮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용은 좀 다르지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기자들 중에 시험 성적이 우수했던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는 몰라도 언론은 법조 출신 정치인들의 사법연수원 성적을 거론하는 걸 좋아한다. 일류 대학 출신이 아니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장학금을 받고 그 다음 서열의 대학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는다. 아마도 김 의원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심정으로 시험성적을 거론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험 성적과 인간관계 능력은 그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이 인간관계는 좋더라는 속설이 있긴 하지만, 이 속설은 검증을 필요로 하거니와 설사 타당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아이 때 이야기일 뿐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사람을 다스리는 재주'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 말이다. 주요 조직의 우두머리엔 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다. 그렇다면 시험성적이 좋은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재주도 뛰어나다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김 의원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검찰의 의리"를 비판적으로 지적한 건 백번 타당하지만, 문재인 정권 사람들은 어떤지 그것도 동시에 살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한국의 모든 권력 엘리트 집단이 갖고 있는 적폐적 속성을 청산하려면 특정 집단만 그런 것처럼 덮어 씌우는 방식으론 성공하기 어렵다. 문 정권의 내로남불에 염증과 환멸을 느끼는 국민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든 걸까? 그렇게 보기엔 김 의원의 표정은 늘 근엄하다. 너무 근엄해서 문제일 정도이다. 김 의원은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놓고 "문재인 정부에서 기어코 피 맛을 보려는 무리들에게 너무 쉽게 살점을 뜯어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 너무 살벌하다! 언론인 출신 김 의원이 고작 이런 수준의 비분강개에 머무르다니, 너무 실망스럽다.
나 역시 박 후보자가 '외교행낭을 이용한 밀수'라는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해외이사 대행업체를 이용했다는데 왜 이게 바로 잡히지 않았을까? 이주현 한겨레 정치부장이 쓴 "사라진 '외교행낭'을 찾아서"라는 칼럼을 읽고나서 이해가 되었다. 나는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그릇된 보도에 항변했다면 분위기를 바꿨을 수도 있다"는 김 의원에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문 정권은 적극 항변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 임명을 위한 정략적 고려가 작용했던 건 아닐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기어코 피 맛을 보려는 무리들"이란 표현을 쓴 건 지나치다. 그런 '무리들'은 없다. 문 정권 사람들도 야당 시절 똑같은 행태를 보였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 시절에 피 맛을 보기 위해 그랬던 건 아니잖은가. 문 정권에서 야당 동의 없이 임명된 장관급 인사는 31명으로 늘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 3명, 이명박 정권 17명, 박근혜 정권 10명 등 도합 30명을 넘어선 기록이 탄생했다. 이게 "기어코 피 맛을 보려는 무리들"의 광분 탓인가, 아니면 문 정권의 독선과 오만 탓인가?
뭔가 '게임의 룰'이 잘못된 건 아닌지 그것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김 의원이 오랜 언론인 경험에 근거해 인사 청문회 제도와 언론 보도의 개혁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 의원은 청와대 대변인 시절 "문재인 정부 DNA에는 민간 사찰이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선한 권력 DNA'같은 건 없다는 걸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적대'와 '증오'보다는 '타협'과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의정활동을 해주시길 기대한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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