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빗물받이에 고래가 나타난 까닭은
권라영
ryk@kpinews.kr | 2021-01-29 17:47:16
"빗물받이에 버린 담배꽁초, 미세플라스틱 돼 해양오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 뒷골목 빗물받이에 고래가 나타났다. '바다의 시작'이라는 문구와 함께다.
이 골목은 주민들 사이에 담배꽁초가 많이 버려지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 담배꽁초를 버리면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이 무색하게도, 바로 옆 빗물받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곤 한다.
"흡연자인 친구와 같이 길을 걷다가 담배 피우는 걸 기다려준 적이 있는데, 담배꽁초는 어디다 버리냐고 물어보니 땅바닥에 버리기 좀 그러니까 빗물받이에 넣는다는 거예요. 그때 많이 놀랐어요. 다른 흡연자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비슷하게 얘기하더라고요."
김예원(23)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빗물받이가 재떨이처럼 여겨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빗물받이로 들어간 담배꽁초는 강을 거쳐 바다로 간다. 가장 큰 문제는 담배꽁초의 플라스틱 필터다. 이 필터는 바다로 가는 길에 분해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미세 플라스틱이 된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만 하루 최대 0.7t의 미세플라스틱이 바다로 유입된다고 한다.
미세 플라스틱은 해양생물이 섭취하게 되고, 이는 다시 인간의 식탁으로 돌아온다. 도시의 미관을 해치지 않으려는 나름의 선심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해양생물에게 피해를 끼치며, 결국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셈이다.
"흡연자들이 빗물받이에 담배꽁초를 넣는 것에 대해 크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어요. 오히려 땅에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수거하면 되니까. 그런데 빗물받이에 한 번 들어가면 수거가 어렵고, 미세플라스틱이 돼 바다로 흘러가죠. 이건 꼭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김 활동가는 인식 개선 방안을 고민했다. 쓰레기통이나 재떨이를 적절히 배치하도록 요청하는 방안, 사람들에게 휴대용 재떨이를 나눠주는 방안 등도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빗물받이는 바다의 시작점이고, 그래서 담배꽁초를 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빗물받이에 메시지를 담는 것이 가장 직관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지금과 같은 '바다의 시작' 캠페인이 탄생했다. 디자인은 빗물받이가 고래의 몸통처럼 보이게끔 배치해 사람들이 담배꽁초를 버리기 전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지난주 종로구청 흡연 없는 마을 만들기 협치사업팀과 함께 마로니에공원 뒷골목에 빗물받이에 그림과 문구를 새겨넣는 작업을 했다. 추위에 손이 꽁꽁 얼었지만 핫팩으로 녹여가면서 정성을 담았다.
"저희가 눈에 잘 띄는 파란색 점프수트를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지나가시는 시민분들이 관심을 많이 주셨어요. 뭐냐고 물어봐주시고, 설명해드리면 여기 담배꽁초가 너무 많은데 좋은 작업 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도 해주셨어요."
작업 중 골목에서 만난 흡연자들에게도 직접 가서 취지를 설명했다고 김 활동가는 말했다. 처음에는 눈을 피하던 이들도 설명을 듣고 나서는 "빗물받이가 바다와 연결된다는 것을 몰랐다"면서 "앞으로 빗물받이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겠다"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기자와 함께 현장을 다시 찾은 지난 28일은 눈이 펑펑 내렸다. 김 활동가는 악천후에도 그림이 잘 남아있을지 걱정했다. 작업물이 온전한 모습을 본 그는 다행이라며 활짝 웃었다.
"아무리 이런 작업을 한다고 해도 결국에 변화를 만드는 건 흡연자분들이에요. 개인 한 명 한 명이 담배꽁초를 빗물받이에 버리지 않고 휴대용 재떨이를 가지고 다니는 등 잘 수거한다면 큰 변화가 생길 거예요."
KPI뉴스 / 권라영 기자 ry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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