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설의 춤꾼' 최승희 생가터 확인…연세대와 인연은?
이원영
lwy@kpinews.kr | 2020-08-27 16:03:56
최승희 연구가 조정희 씨 발품 팔아 확인
연희전문 언더우드 교장·정인보 선생 거주
1920년대에 미국의 이사도라 덩컨이 있었다면 1930년대에는 조선의 최승희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몸짓으로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현대 무용사의 걸출한 스타였다. 교통수단도 불비했던 그 당시 두 사람은 세계를 무대로 명성을 날렸던 국제적 스타였다.
'전설의 춤꾼'으로 불린 최승희(1911~1969)는 일제 말엽인 1937~1940년 미국, 유럽, 남미 대륙을 돌며 우리의 고전무용을 현대화한 독특한 양식의 춤사위를 알렸다. 미국 10회, 프랑스 23회, 네덜란드 11회, 벨기에 9회, 중남미 61회 등 모두 150여 회의 해외공연을 했다.
미국 공연 당시 뉴욕타임스는 "세계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가다. 그의 예술은 사람들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란 찬사를 보냈다. 가히 최초의 '한류 스타'였던 셈이다.
이렇게 걸출한 예술인이었건만 그는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한동안 지워졌었다. 분단 공간에서 사회주의자 평론가였던 남편 안막과 함께 북으로 간 '월북 인사'였기 때문이다.
근자에 들어 언론을 통해 최승희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그에 대한 변변한 저술이나 전문가도 없는 형편이다. 이런 가운데 최승희 연구에 '미친' 인물이 나타났다. 오랫동안 미국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던 조정희(59) PD다(최승희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연구가이기에 PD로 불리길 원한다).
조 PD는 미국은 물론, 일본 42개 도시, 유럽 7개국 12개 도시를 돌며 80여 년 전의 최승희가 남긴 흔적을 찾아 샅샅이 헤맸다. 당연히 국내 연구도 병행했다. 국내 연구의 출발점은 서울이었고 첫 주제가 바로 최승희 생가였다. 이 과정에서 조 PD는 새로운 역사적인 사실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최승희의 생가터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UPI뉴스는 조 PD가 집필 중인 최승희 평전 원고 중 생가터에 관한 부분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이에 따르면 최승희의 생가터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 167번지다. 현재는 세종문화회관 뒤편 세종로대우빌딩 자리다. 최승희 생가터 확인에 대해 조 PD는 '전율적인 발견'이라 말한다.
최승희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황해도 해주, 경성(서울), 강원도 홍천 등으로 분분하고, 서울 안에서도 체부동, 수운동, 재동 등으로 혼선이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조 PD가 최종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생가가 남아있는 것도 아닌데 생가터를 찾아낸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기도 하지만 조 PD의 생각은 다르다.
"최승희는 미국으로 치면 이사도라 덩컨이나 헤밍웨이급 예술가다. 러시아로 치면 푸시킨이나 니진스키 수준이다. 그 네 사람의 생가는 모두 알려져 있고 박물관으로 꾸며져 관광객들의 성지가 되어 있다. 한국의 처참한 근대사와 왜곡된 현대사가 걸출한 민족 위인의 생가나 그 터마저 잊고 살게 한 것이다. 복원까지는 못하더라도 집터라도 알아내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었다."
그가 준비하고 있는 최승희 평전 1편의 제목이 '최승희 생가터 찾았다'인 걸 보면 연구자로서의 발굴의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작 최승희 생가터를 확인하는 작업이었지만 그 과정은 지난했다. 조 PD의 '최승희 생가터 찾기'를 복원하면 이렇다.
당대의 각종 자료를 섭렵했다. 관련된 주소는 여럿 등장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없었다. 종로구청을 찾았다. 민원 담당관에게 연구의 목적을 설명하고 호적 열람을 요청했다. 직계 존비속이 아니어서 직접 열람은 불가하고 내용의 일부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승희 부친 최준현의 호적에는 최승희 출생 당시의 주소가 분명치 않았다.
다른 공식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부, 지적원도, 그리고 지금의 토지등기부 등. 서울중앙지방법원 중부등기소에서 최승희와 관련된 모든 주소의 토지와 가옥의 등기부 등본을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최승희 부친 최준현이 1911년 6월 27일 '경성부 수창동 198번지' 가옥을 매입했다가 1923년 매도한 사실을 확인한다.
최승희의 생일이 1911년 11월 24일이므로 주택 소유 기간과 겹친다. 그러나 이 집에서 최승희가 태어났다고 확증할 수 없었다. 부자였던 최준현의 '다주택자' 가능성 때문이었다.
다시 교차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기록원의 '지적아카이브'에서 제공하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대장'을 열람했다. 1913년 발간된 기록에는 '수창동 198번지' 대지 51평의 이 가옥 소유주는 최준현으로 재차 확인됐다.
토지조사대장의 규칙에 따르면 가옥 소유자가 주소에 살지 않을 경우 별도의 란에 소유자의 현주소를 기입하게 되어 있는데 그 란은 비어 있었다. 가옥을 매입한 1911년 6월 27일부터 토지조사가 이뤄진 1912년 11월 6일까지 최준현은 그 주소에 살면서 막내딸 최승희를 출산한 것이었다. 수창동 198번지가 최승희의 생가 주소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수창동과 내자동이 합쳐 내수동이 되었고 지금의 주소 '내수동 167번지'가 바로 그 자리다. 지금은 최승희 집터의 흔적도 없지만, 당시엔 기와집이 즐비한 고급 주택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집 주인이 바뀌는 과정도 흥미롭다. 이 집은 이은호-김명배로 주인이 바뀌었다가 미국인 H.H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역사학자 정인보 선생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H.H 언더우드는 구한말에 활동했던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의 장남으로 1930년대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으로 재직했다.
정인보 선생은 상해에서 귀국해 1936년 연희전문 교수로 부임하는데 경성에 거처가 없는 정인보 교수를 위해 언더우드 교장이 자신이 샀던 집을 매도, 혹은 보수의 일부로 증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조 PD의 생각이다.
조 PD는 "최승희의 생가가 몇 사람의 손을 거친 후 연희전문학교의 교장과 교수에게 전해졌고, 이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한국의 명문대학의 하나인 연세대학교의 조성과 발전이 이뤄졌다는 점도 그저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아까운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대학에서 범죄사회학을 가르치며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는 조 PD는 은퇴 후 예술·문화 사회학으로 방향을 틀던 중 뉴욕에서 차길진 법사(작고)로부터 최승희 유럽공연 취재를 부탁받은 게 최승희 연구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됐다.
그는 "최승희를 취재하면서 그의 삶과 춤에 충격에 가까운 감명을 받았고, 내 남은 역량을 쏟아 그를 재조명하고 싶다"고 했다. 최승희 평전과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독일 쾰른 무용박물관에 헌정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KPI뉴스 / 이원영 기자 lw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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