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부조화' 내세운 '우발 범행' 주장으로 살 길 찾는 오거돈

주영민

cym@kpinews.kr | 2020-06-03 16:07:04

제정신 아닌 상태 범행 주장…벌써 감형 고려
"사안 중대해도 힘 있고 돈 있으면 구속 면해"
2차 피해자보다 가해자 방어권 중요한 사법부

'인지부조화.'

집무실에서 부하직원을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는 오거돈 전 부산시장 변호인단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그가 우발적 범행을 한 것"이라며 꺼낸 말이다.

인지부조화는 신념과 행동 등이 불일치하는 상태를 인간이 견뎌내지 못해 이를 제거하고 일치시키려고 한다는 실험심리학 용어다.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가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다는 변론이 나온 이유는 술이나 약에 취한 상태로 범행을 저질렀을 때 그 당시 상태가 심신미약이었다는 사유로 감경을 받으려는 것과 같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2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은 이후 대기장소인 부산 동래구 동래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다. [뉴시스]

제정신이 아니라 집무실서 강제추행?…감형 밑밥 깔기

오 전 시장의 강제추행 사건이 벌어진 곳이 집무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술이나 약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변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꺼내든 인지부조화는 부하직원을 집무실로 불러 강제추행 한 오 전 시장이 '계획적인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한 검찰의 주장을 뒤엎으려는 방편으로 풀이된다.

성추행 사실을 인정한 오 전 시장 측이 향후 있을 수사와 재판에서 감형을 받기 위한 밑밥 깔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조상희 법무법인 연송 변호사는 "인지부조화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음주감경 등의 주장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획적이 아닌 우발적으로 발생한 범행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사건 당시 제정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혹해서 벌어진 범행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향후 재판에서 혐의가 명백해 실형이 나올 가능성이 크니 감형을 받는 방향으로 전략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오 전 시장 측의 이 같은 전략은 일단 구속을 면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으로 촉발된 고위공직자의 부하직원에 대한 성범죄를 바라보는 국민의 공분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작부터 '감형'을 받기 위한 오 전 시장 측의 행태는 '정당한 방어권 보장'이라기 보다는 꼼수로 보일 공산이 크다.

오 전 시장의 변호인 측이 구속심사에서부터 이 같은 전략을 내세운 이유는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법부의 변치 않는 시선에 기인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심신미약·음주상태·초범·대학생 등이 성범죄에 있어 감경 사유로 늘 거론되고 피해자와의 합의가 이뤄지면 사안이 심각하더라도 '집행유예'에 그칠 확률이 높기에 가해자들의 방어권 보장을 빌미로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게 현실이다.

피해자들이 "가해자 보호자나 변호사가 합의를 해달라고 연락하고 집과 회사로 찾아오기 때문에 소문이 날까봐 합의해 줄 수밖에 없었다"며 치를 떨지만, 사법부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방어권을 더 보장한다.

이처럼 법관의 재량이 과도하다 보니 성범죄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공식이 성립한다. 전관 변호사를 선임하면 형량이 크게 줄어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 성희롱 성추행 이미지. [셔터스톡]

"피해자는 2차 가해로 괴로운데 가해자는 구속 걱정 없이 재판" 

오 전 시장은 법무법인 지석, 상유 등 변호인 4~5명과 함께 영장심사에 출석했다. 이들 변호인은 성범죄에선 이례적으로 '인지부조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경찰이 오 전 시장의 혐의가 중대하다고 판단해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가 아닌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검찰이 이를 법원에 청구하면서 '계획적 범행'을 강조했지만, 법원은 오 전 시장의 방어권 보장을 더 우위에 뒀다.

폭행 또는 협박을 전제로 한 강제추행은 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돼 있다. 3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보다 법정형이 세다.

고위 공직자의 성범죄라는 혐의의 중대성 등으로 미뤄 구속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법조계 일각의 예상은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면서 빗나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장 기각에 대한 부산여성계의 반발이 거세다.

부산성폭력상담소 등 여성·시민 단체 연합체인 '오거돈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보도 자료를 내고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한 판사가 이 사안에 대해서 국민에게 던진 대답은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비록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구속에 대한 걱정 없이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권력에 의한 성폭력 범죄를 예방하고, 공직의 무거움을 알리는 이정표를 세울 기회를 법원은 놓치고 말았다"며 "권력형 성추행은 지독한 범죄인데 사안의 중대성이 제대로 다뤄졌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2차 가해로 괴로워하고 있다. 언제 다시 자신의 근무장소로 안전하게 복귀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피해자는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가해자만 구속이 기각된 채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시대가 변화하고 있는데 법원은 그렇지 않다"며 "중대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자가 불구속 재판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초범이라는 등의 이유로 가벼운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질까 두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KPI뉴스 / 주영민 기자 cym@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