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시작하는 한국인 이야기"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0-02-18 16:23:26

10년 만에 '한국인 이야기' 첫권 출간한 이어령
차이를 잘 견디지 못하는 한국인, 상생 도모해야
'기생충' 아카데미상 수상, 한국 영화 대역전극
마지막 선택은 한국인 집단 기억 전하는 '이야기꾼'
▲10년 동안 고쳐온 '한국인 이야기' 첫 권을 출간한 뒤 18일 낮 기자들과 만난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정병혁 기자]


한국 대표 지성으로 각광받아온 이어령(86)을 수식하는 명칭은 다양하다. 문학평론가로 시작해 학자, 언론인, 소설가, 시인, 행정가, 문화 기획자 등을 두루 거치거나 동시에 역할을 수행하면서 말년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 그동안 따라붙었던 거창하고 화려한 직함들은 모두 버리고 '이야기꾼'으로 남겠다고 선언하며 10년 동안 붙들어온 '한국인 이야기'를 펴내기 시작했다.

그 첫 권 '탄생·너 어디에서 왔니'(파람북)는 아이가 엄마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시작해 여섯 살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이 어떻게 형성돼가는지 더듬어본 이야기다. 그는 동요 '꼬부랑 할머니'를 예로 들면서 "세상이 골백번 변해도 한국인에게 꼬부랑고개, 아리랑 고개 같은 이야기의 피가 가슴 속에 흐른다"고 적시한다. 꼬부랑할머니 이야기 열두 고개 형식을 빌려 12개 이야기를 첫 권에 담았다.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그는 이 책 출간을 계기로 기자들이 요청한 개별적인 인터뷰는 모두 거부하다가, 18일 낮 자택 인근 서울 평창동 음식점에서 정식 기자회견은 아니라는 전제 아래 몇몇 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젊었을 때 죽음을 아는 건 축복이고 늙어서 아는 건 비극"이라며 "젊으면 늙고 늙으면 죽는다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정말 몸으로 체득한다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은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작금 한국 사회의 분열 양상에 대해서는 "한국인은 본디 융합에 익숙해서 서양처럼 차이를 잘 견디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창조적인 상생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은 구한말처럼 아주 어려운 처지에 직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투병 중이라고 하나 여전히 넘치는 에너지로 두 시간여 동안 시종 정력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파한 그는 다시 이어질 방송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떴다. 
 

▲한국의 대표 지성으로 각광받아온 이어령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교유 관계가 구분됐다고 말했다. [정병혁 기자]


ㅡ'한국인 이야기'는 10년 전 일간지에 연재한 뒤 큰 수술을 거치고 다시 수정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것으로 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와 어떤 차별성을 지니는가.

"지금까지 모든 한국인 이야기는 태어난 뒤, 그것도 세 살 이후의 이야기들이지만 처음으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한국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20대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통해 산업화를, 이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당기자는 기치 아래 정보화를 주장하며 나아갈 길을 선도적으로 제시해왔다. 이제 '생명화시대'의 한국인 이야기를 펼쳐보았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 뱃속의 세상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그승'이다. 생물학자들 말에 따르면 10개월 동안 뱃속에서 진화된 36억 년의 역사를 살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 이야기를 36억 년 전에서부터 시작하고 더 올라가 빅뱅까지 만난다."

ㅡ작금 한국 사회는 극심하게 분열돼 있다. 혹자는 해방공간의 좌우익 갈등보다 더 심각하다는 진단까지 한다.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 관점에서 이 사태를 분석한다면 어떤가.

"한국의 문화는 원래 융합에 익숙하다. 비빔밥이나 국밥을 보아도 그렇다. 국물 속에 건더기가 있다. 따로 먹지 않는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같이 쓴다. 그래서 수저다. 숟가락은 음이고, 젓가락은 양이다. 음양을 같이 쓰는 것이다. 서양이나 중국도 식사 도구를 우리처럼 쓰지 않는다. 조화를 도모하는 게 우리 특성인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양극화에 훈련이 안 돼 있다. 서양은 차이에 익숙한데, 우리는 합쳐지는 것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같잖다'는 말이 생긴 거다. 나와 '같지 않은 놈'들이 다양해지고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양상을 우리는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사회의 다양성을 못 견디니 패를 가른다. 같지 않은 사람끼리 살아보지 못해서 외국인 노동자를 업신여기고 내 편 네 편 갈라 같은 사람끼리 살려고 한다. 서구사회가 근대화 이후 개인주의적 삶을 300년 동안 견뎌오면서 옛날에는 '독창성'이라는 개념이 나쁜 뜻이었지만 지금은 좋은 의미로 정착했다. 자유 사회의 개인과 사회주의의 집단, 우리는 양쪽을 다 받아들였는데 훈련이 돼 있지 않아서 집단주의에도 개인주의에도 적응을 못했다. 18~19세기 계몽기 근대화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채 엄청난 쓰나미가 우리에게 온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조화가 잘 돼서 평화로우면 활기가 없는 사회일 수 있다.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터지고 싸우는 건 아직도 우리 사회가 젊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힘 빠지면 싸우고 싶어도 못 싸운다. 나는 지금처럼 철저하게 갈라져 싸우는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창조적으로 어떻게 상생 단계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은 구한말처럼 아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ㅡ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지 30여 년이 지났는데,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감회가 어떠신가.

"예전에 영화를 만들 때 말이 국산이지, 국산 영화는 외화쿼터를 따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제 거꾸로 외화의 본거지에 가서 상을 타는 역전극이 벌어졌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BTS도 '기생충'도 제 나라말을 가지고 성공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우리 영화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극본 같은 문학적 콘텐츠였는데 '기생충'은 권선징악을 떠나서 입체적으로 그렸다. 강한 메시지를 지니면서도 사회의 어두운 면을 상투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메시지를 다루는 방법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 옛날부터 가무악(歌舞樂)은 중국이나 일본이 아무리 해도 못 따라오는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다."

▲'한국인 이야기' 완간 이후 이어령은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사유와 탐구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정병혁 기자]


ㅡ'한국인 이야기' 집필 이후 시간이 허락된다면 더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한국인 이야기' 12권 분량 원고는 이미 작성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죽음이란 무엇인지 정리해보는 일이다. 탄생은 내가 모르지만 쓸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의 세계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마지막 대상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 나는 이 세계를 끝없이 글로 써왔다. 젊었을 때 죽음을 아는 건 축복이고 늙어서 아는 건 비극이다. 젊어서 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강조하는 거다. 젊은 사람은 언젠가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정말 몸으로 알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고 사랑과 평화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넘칠 것이다. 죽음은 생의 동력이다. 어둠을 모르고 어떻게 빛을 알며, 빛을 모르고 어떻게 어둠을 알겠는가."

ㅡ학자, 언론인, 소설가, 시인, 행정가, 문화 기획자 등 '이어령'을 수식하는 수많은 직함 중 어느 것에 더 애정이 가는가?

"나는 '이야기꾼'을 선택했다. 학문을 좋아했으면 한국인론을 써야지 이야기를 쓰겠는가.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건 이야기다. 애들에게 집단기억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애들이 살지 못한 태곳적 이야기까지 해주는 거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죽는 건 자신의 이야기 하나를 보태주고 가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인만의 태명, 포대기 같은 것의 의미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우리가 태명을 사용하는 건 어머니 뱃속의 36억 년 전 세계와 대화를 나누는 의미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틀리든 맞든 모두 처음 하는 이야기들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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