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타나는 몽롱한 공간의 유령들

조용호 문학전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19-12-05 16:27:30

하성란·이장욱의 동명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됐지만 이즈음 거리에는 캐럴이 잘 들리지 않는다. 특정 종교의 대축일을 떠나 모두의 축제처럼 받아들여지던 분위기는 많이 사그라진 듯하다. 지속되는 불경기에다 갈등과 비난이 수그러지지 않는 전쟁 같은 사회 분위기 탓일 수도 있다. 이런 때 소설 속으로 잠시 눈길을 돌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누리는 것도 한 해를 보내면서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다.

최근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소설 두 편이 눈에 띈다. 하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나온 하성란의 경장편 '크리스마스 캐럴'이고, 또 하나는 이장욱 소설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문학동네)에 수록된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소설은 구두쇠 스쿠루지 영감이 나오는 찰스 디킨스의 동명 작품이 대표적이고, 하성란이 인용한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도 그 중 하나다. 공통으로 유령이 등장하고, 현실과 환상이 중첩되는 배경이 특징이다. 하성란과 이장욱도 이들 작품을 패러디하면서 몽롱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만들어낸다.
 

▲ 경장편 '크리스마스 캐럴'의 작가 하성란. 그녀는 "어느 모퉁이 힘이 들고 두려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문득 들려온 캐럴이 위로가 될지 모른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견디는 몽롱한 방식

한 남자가 막내 여동생에게 죽자 사자 따라다니며 구애를 했다. 막내는 그의 청을 받아들였지만, 허랑방탕한 그 남자 '김'은 사업을 한답시고 아내를 고생만시켰다. 결혼 예물로 받았던 명품시계 카르티에가 2년8개월 결혼 생활의 유일한 물증이었지만, 그 시계마저 '유령의 시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팔목에 흔적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하성란이 전개하는 '크리스마스 캐럴' 이야기다.

소설은 헨리 제임스의 크리스마스 소설 '나사의 회전' 첫 문장, "그 이야기는 그날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우리를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했다"로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처럼 친정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가장 곡절이 많았던 막내가 자신이 강원도 오지의 리조트에서 열흘 동안 겪었던 이상한 체험을 털어놓는다. 남편 '김'이 산골 오지 리조트에 투자해 망하기 직전, 오갈 데가 없어진 마당에 술에 취했던 막내를 그곳에 머무르게 했던 것이다. 정작 '김'은 소식이 없고 귀가 뭉개지고 코가 낮아진 전직 레슬링 선수와 복서가 그녀를 거기에 데려다 주었다. 밤이면 모든 이들이 리조트에서 철수하고 그녀 혼자서만 '계수나무' 방에 방치된다. 커다란 발코니 창 너머 어둠 속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검고 커다란 두 눈에 놀라는데 그것은 유령일지도 모르고, 그녀 자신일 수도 있으며, 날개에 눈동자처럼 크고 검은 얼룩이 있는 나방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가 밤에 뛰어다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다가 흐느끼며, 연락이 끊겼던 여자 동창으로부터 뜬금없이 그녀를 좋아했다는 남자 동창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도 받는다. 처음 도착할 무렵 봉분처럼 느껴졌던 리조트 지붕이 열흘 후에 떠날 때 보니 실제 봉분들이었다고 막내는 기억한다. 죽었다는 동창 김진호가 예전에 계곡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사실을 기억하다가 리조트 뒤편 밤나무숲을 헤매면서 계곡 물에 결혼 예물 명품시계를 잃어버린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배경 속에서 그 당시 상황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역설적인 증거는 그녀의 팔목에 있던 시계의 부재다. 결국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환멸만 남은 2년8개월을 견디게 하는 방식이 어쩌면 의도적인 기억의 착종일지 모른다.

 

▲ 소설집 '에이프릴 마치'에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을 수록한 이장욱. 그가 그려낸 지금 이곳의 젊은 '스쿠루지'는 잘나가는 투자자문업체 오너다. [문학동네 제공]


과거와 미래의 분신 앞에서 죽음과 마주하기

이장욱의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은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과 구조가 흡사하다. 어느날 자정 무렵 아내의 전 남친이었다는 젊은 친구가 다짜고짜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온다. 그 녀석은 자신이 지금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밤하늘의 별자리들이 잠깐 궤도에서 이탈한 기분'이 드는 그 밤에 남자는 하릴없이 그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 남자는 벤틀리를 타고 다니는 신흥 투자자문업체 캐피털 컨설팅의 오너이다. 창밖으로 탁 트인 한강이 보이는 74평 집에서 바흐의 평균율을 듣는 쿨하고 잘 나가가는 처지다. 대학시절 자주 다니던 학교 앞 단골 술집에서 젊은 친구를 만나는데 그 친구는 정작 만나자마자 자신이 아니라 바로 남자가 오늘 죽을지 모른다고 딴소리를 한다. 말미에는 늙은 노인이 나타나 젊은 친구가 일을 벌이지 못하면 자신이 대신 죽기 위해 나타났노라고 황당한 말을 늘어놓는다.

남자도 젊은 친구 나이에는 나름대로 순진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한 쿨한 캐릭터다. 그가 생각하는 진실은 가면 속이 아니라 겉에 있다.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그게 인생의 본질에 좀 더 가깝다는 걸 알아야 한다. 가면을 벗고 살아가자고 떠드는 자들은 아직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애송이들일 뿐이다. 가면을 벗으면 거기 있는 것은 진실이나 진심 같은 게 아니라, 붉은 피로 물든 살갗이다."

남자가 집에 돌아와 보니 한 시간쯤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아침 6시가 되었고, 침대에는 탱탱하고 매끈한 피부의 와이프가 아닌 이상한 여자가 누워 있다.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잔주름들과 검푸르게 죽어 침침한 피부색, 퀭하게 살 속으로 파고들어간 눈, 흐물흐물 늘어진 목덜미의 살갗을 지닌 늙은 와이프가 자고 있었다. 채 닫히지 않은 방문 틈으로 늙은 목소리의 캐럴이 들려온다. 남자의 과거와 미래의 그 분신들은 현재의 그가 자신을 기만하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무의식 심층의 죄책감이나 불안감의 현현일 터이다.

찰스 디킨스나 헨리 제임스, 하성란이나 이장욱처럼 크리스마스 시즌에 몽롱한 사람과 공간을 찾아 환상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떤가. 어떤 유령을 만나고 어느 컴컴한 공간을 떠돌아도, 적어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안전하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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