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의 연예비사] 최무룡, 한량과 바보 사이
김병윤
| 2019-04-08 16:58:11
최무룡은 한량이었다. 노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술과 친구, 마작, 낚시를 좋아했다. 최무룡은 1928년생 무진년 용띠이다.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부모님은 이름을 무진으로 지으려 했다. 무진년에 태어났다고. 나중에 진자 대신 용띠의 용자를 붙였다. 그래서 최무룡이 됐다. 원로 배우 신영균과 동갑이다. 최무룡은 조연 연기를 못 했다. 연기가 돋보여서 주인공이 죽었다. 타고난 주연배우였다. 그런 면에서는 신성일과 비슷하다. 최무룡은 노력을 안 했다. 배역이 주어지면 연습 없이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어떤 배역이든 잘 소화해냈다. 타고난 배우였다. 천부적 소질을 갖고 있었다.
최무룡의 삶에서 술은 빠질 수가 없다. 술을 정말 좋아했다. 좋아한 정도가 아니다. 술을 사랑했다. 주종불문. 두주불사. 이 말은 최무룡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을 정도였다. 술 없이는 하루도 못 살았다. 술자리에는 수많은 친구가 있었다. 최무룡만큼 친구가 많은 사람도 보기 힘들었다. 사람이 착하고 좋았다. 단점이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귀가 정말 얇았다. 팔랑귀였다. 남의 말을 너무 믿었다. 세번의 영화제작도 남의 말을 듣고 시작했다. 결국 영화제작 실패로 김지미와 이혼하게 됐다.
최무룡은 정이 많았다. 다른 사람이 부탁하면 돈을 꿔서라도 빌려줬다. 그리고는 돈을 갚지 못했다. 필자는 실제로 여러 번 경험했다. 다방에 함께 앉아 있으면 누군가 와서 인사를 했다. 후배라고 소개를 했다. 얘기는 뻔했다. 돈을 꿔달라는 부탁이었다. 최무룡은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런 행동은 본인에게 치명타가 됐다.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왔다. 빚쟁이의 독촉이 심해졌다. 신용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에게도 경제적 풍요를 누렸던 시절이 있었다. 뉴욕에서 생활한 5~6년 동안이었다. 김지미와 이혼 후 외로운 시절이었다. 김지미와의 이혼은 최무룡에게 큰 충격이었다. 최무룡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뉴욕에 들렀다. 코미디언 양훈과 함께. 필자도 뉴욕에 살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식당에서 만났다. 주인과 친분이 깊었던 식당이었다. 반가움에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밤새 술자리가 이어졌다. 식당 주인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식당 주인이 제안했다. 식당에서 노래를 불러 달라고. 그리고 월급 받는 사장직책을 주겠다고. 필자도 추천했다. 굳이 한국에 갈 이유가 뭐 있냐고 말했다. 얼떨결에 사장 최무룡, 총지배인 양훈 체재가 출범했다.
최무룡은 시쳇말로 바지사장이었다. 둘은 한집에서 살았다. 나이는 양훈이 2살 위였다. 두 사람은 서로 존중했다. 서로 존댓말을 썼다. 나이 차이는 두 사람에게 의미가 없었다. 최무룡은 손님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최무룡의 노래 실력은 가수 뺨칠 정도였다. 손님들의 호응이 좋았다. 식당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필자도 식당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일행들과 함께. 일주일에 4~5일은 갔다. 토, 일요일만 빼고 평일에는 거의 출근 도장을 찍었다. 자연히 최무룡의 수입이 늘었다. 정말 돈을 많이 벌었다. 아마도 최무룡 삶에 있어 가장 돈이 많았던 시기였을 것이다. 돈 걱정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다.
필자는 최무룡의 성공을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 얼마 안 돼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최무룡이었다.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의아했다. 왜 왔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살아야겠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본인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필자는 최무룡이 안 돌아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뉴욕 생활이 전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무룡의 한국생활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술과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친구 중에는 여자들도 많았다. 최무룡은 여자를 좋아했다. 대부분 남자가 그러하듯이. 그러던 어느 날 최무룡이 전화를 했다. 워커힐 어느 아파트로 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갔다. 굉장히 넓은 아파트였다. 가구도 호화스러웠다.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웬 여인이 나왔다. 인사를 시켜줬다.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동거녀였다. 알고 보니 최무룡의 열성 팬이었다. 대단한 부자였다. 최무룡의 매력에 빠져 같이 살자고 청혼했다. 최무룡에게는 세 번째 여인이었다. 친한 사람들은 그녀를 워커힐 여인이라 불렀다. 워커힐 집을 나서며 한 마디 했다. 아무래도 최 형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다고. 최무룡도 말했다. 그렇지 하면서 씩 웃었다. 얼마 뒤 최무룡이 만나자고 했다. 웬일인가 했다. 쑥스러운 모습으로 말했다. 워커힐에서 나왔다고 했다. 워커힐 여인과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최무룡은 또 한 번의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안산 여인이었다. 20여 살 차이가 나는 순박한 여인이었다. 정말 순정을 바친 여자였다. 아주 착했다. 돈도 많지 않았다.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최무룡을 성심성의껏 돌봤다. 최무룡의 마지막 길도 함께 해줬다. 정작 최무룡의 빈소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밖에서 울기만 했다. 빈소는 아들 최민수가 지키고 있었다. 아마도 최민수가 무서웠을 수도 있었겠다. 그토록 착한 여인이었다.
최무룡의 장례는 김지미가 앞장서 치렀다. 손님맞이에 바쁜 김지미에게 한 마디 했다. 저기 우는 여자 누구냐고. 안산 여자 아니냐고. 왜 저렇게 우냐고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종일 저렇게 울고만 있다. 최무룡 씨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필자가 한 마디 거들었다. 김지미 당신보다 낫다고 했다. 김지미가 웃으며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런 것 같다고. 이 얘기를 하는 것은 김지미의 인간성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옛 남편의 마지막 길을 챙겨주던 모습이 아름다웠다.
최무룡이 떠난 지 꼭 20년이 됐다. 수많은 친구와 선·후배 동료들을 두고 훌쩍 떠났다. 모든 사람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사라졌다. 필자는 평소 최무룡에게 바보라고 했다. 손해만 보며 살았기 때문에. 최무룡이 떠나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대가 바뀌었다. 모두들 각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따스한 정도 없어졌다. 바뀌어 가는 세태를 막을 수는 없다. 단지 아쉬움 속에 바보들의 삶을 떠올릴 뿐이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보 최무룡이다.
KPI뉴스 / 정리=김병윤 기자 bykim7161@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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