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의 연예비사] 나그네처럼 떠난 최희준

김병윤

| 2019-02-02 09:00:01

판사 꿈 접고 가수된 서울법대 출신 가수 1호
▲ 가수 최희준 [뉴시스]

 

세계문화 예술계에 한류열풍이 뜨겁다. 오늘의 한류열풍은 어려운 시절을 극복해온 대중예술 선배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예술인들이 딴따라라고 멸시받던 1960년대에 주간한국 연예담당 대중예술을 지면화한 언론인이 있다. 후배 연예담당 기자들은 그를 연예기자 대부라 말한다. 한국 대중예술의 산증인 정홍택 전 기자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연예비사를 알아본다. [편집자주]

 

최희준은 바보다. 평생 손해만 보고 살다 갔다. 사람을 너무 좋아했다. 인간성 하나는 최고다. 필자의 친한 친구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최희준과 물 한 모금이라도 같이 마셔 본 사람들은 인간미에 빠져든다. 최희준은 종로구 익선동 최 부잣집 외아들이다. 명문 경복고와 서울 법대 출신의 엘리트 가수다. 부모님은 최희준을 끔찍이도 아꼈다. 어려서부터 아들에게 최 판사라 불렀다. 그만큼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최희준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부모님은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동네잔치도 벌였다. 장래 판사가 될 거라 믿었다. 


이런 최희준이 진학 후 사고를 쳤다. 법전이 아닌 악보에 빠져들었다. 노래 공부를 하겠다며 미 8군에 들어갔다. 김영순이 주선했다. 오디션에서 트리플A를 받았다. 최고의 평가였다. 최희준은 ‘냇 킹 콜(Nat King Cole)’을 좋아했다. 법대 재학 중일 때 냇 킹 콜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최희준은 미 8군에서 냇 킹 콜을 만났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 몰래 8군에서 공연을 했다. 호응이 좋았다. 당시 8군에는 훌륭한 가수들이 많았다. 남자 가수로는 위키 리, 박형준, 유주용이 활약했다. 이들은 최희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라는 모임을 가졌다. 당시로는 드물었던 학사 가수들이었다. 여자 가수로는 한명숙, 현미, 패티 김이 있었다. 이들은 8군 무대를 벗어나 일반 무대로 진출했다. 필자가 처음 기사화했다. 이 기사 때문에 최희준은 큰 시련을 겪는다. 아버지가 기사를 보고 노발대발하셨다. 판사 공부하라 했더니 딴따라로 나갔다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회초리로 수없이 맞았다. 종아리에서 피가 흘렀다. 맞으면서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단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겠는가. 아들의 강한 뜻 앞에 아버지는 결국 판사의 꿈을 포기했다. 아버지는 차라리 “최고의 가수가 되라”며 용서했다. 최희준은 아버지의 말씀을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새기고 살았다.


최희준은 가요계에 데뷔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최고의 히트곡 ‘하숙생’이 전파를 타고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하숙생 열풍이 불 때 최희준이 슬픈 얼굴로 필자를 찾아왔다.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들어 하신다며. 필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어 리듬을 바꿔보라 했다. 그래서였을까. 후속곡인 ‘맨발의 청춘’ ‘빛과 그림자’가 계속 히트했다. 나중에 최희준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노래 부를 때 정말 진지하다. ‘하숙생’을 부를 때는 혼이 담겨 있다. ‘우리 애인 올드미스’는 꼼짝 못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 줬다. ‘맨발의 청춘’은 품위 있는 건달처럼 불렀다. 


최희준의 외모는 가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작은 키. 통통한 몸매. 매력이 없다. 별명도 찐빵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별명을 좋아했다. 겨울이면 방송국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왔다. 찐빵이라는 별명 때문에. 최희준의 인생에 잘못한 게 두 개가 있다. 정치와 사업이다. 최희준과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경복고 동기다. 이 총리는 최희준에게 정치하라고 권유했다. 필자도 정치를 할 거면 일찍 하라 했다. 최희준은 싫다고 거부했다. 그랬던 그가 나중에 정치를 했다. 본인도 나중에 후회했지만. 정치입문 시기를 잘못 택했다고. 최희준의 본명은 최성준이다. 나중에 최희준으로 개명했다. 처음에는 개명에 반대했다.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최희준은 그렇게 고지식한 사람이다. 필자가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선거 때 지명도를 살리라며. 


최희준은 노후 준비를 위해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이런 선택이 최희준에게 또 다른 고통을 줬다. 양식집과 비어홀을 경영했다. 손님이 들끓었다. 겉으론 화려했다.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우선 본인이 술을 좋아해 남는 게 없었다. 음악인들이 외상을 많이 했고 나중에 갚으러 오는 이들도 드물었다. 사람 좋은 최희준은 외상 갚으라는 이야기를 못했다. 사기도 많이 당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다.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최희준은 절대 사업할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 꼬임에 빠져 다른 길로 접어든 것이 아쉽다. 


최희준은 자존심 강한 가수였다. 활동이 뜸하던 말년에 LA 한국일보 초청 교민 위안 공연에 초대를 받았다. 최희준은 소리가 안 나온다며 가수를 은퇴했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예전의 최희준으로 기억되고 싶은 장인 정신이다. 최희준의 장례식장에 문상객이 많지 않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꼈다. 최희준이 누구였는가. 한국 최고의 학벌을 지닌 학사가수 1호. 딴따라로 불리는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한 가수. 최고의 인품을 갖춘 우리의 찐빵 아저씨.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나 훈훈함을 안겨준 남자. 최희준은 그런 사람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로 그렇게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KPI뉴스 / 정리=김병윤 기자 bykim7161@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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