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사파…기다림으로 완성하는 사랑의 공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1-31 17:44:59

전설적 '사랑 시장'이 열리던 베트남 '사파' 문학기행
방현석 중편 '사파에서' 남녀가 기다림을 완성한 무대
무도한 시대 폭력이 앗아가는 인간과 사랑의 향기 복원
"사파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간절한 이야기 연대기"

베트남 서북부의 작은 산악 도시 사파(Sa Pa). 이곳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기다림과 사랑의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다. 소설가 방현석이 중편 '사파에서' 묘사한 이곳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고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간절한 이야기의 연대기'이다. 

 

▲베트남 서북부 고지대의 사파는 층층의 다락논이 상징적이다(위). 희미한 산맥 너머 깊은 흐멍족 마을로 '사랑 시장'은 숨어들었다(아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 말처럼, 사파는 그리움을 간직한 이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사랑시장(Chợ tình Sa Pa)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다시 만나 애틋한 기다림을 채우는 전설 같은 장소다. 매년 음력 3월 27일, 이곳에서는 단 하루 동안 모든 사랑이 허락되는 특별한 날이 펼쳐진다.
 

사파의 대표적인 풍경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식 논과 안개 자욱한 산자락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개발된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며, 흐멍족과 자오족 같은 소수민족들의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이다.

 

▲사파의 마을에서 수공예품을 관광객에게 파는 주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 '사파에서' 강석우와 임정민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 사랑시장을 찾아간다. 어린시절부터 만난 이 남녀는 매번 엇갈리는 인연 속에서 심중 깊은 곳에 사랑을 품은채 사파에서 만났다. 임정민이 마지막으로 사랑시장에서 석우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완성하기를 꿈꾸는 것인데, 1년 후 다시 이들이 오작교에서 만나는 설화 속 남녀처럼 기다림의 인연이라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다. 
 

지난해 말 한베문학평화포럼 참석차 하노이에 갔다가 애틋한 사랑의 설화적 장소인 사파를 찾았다. 사파의 사랑시장은 단순한 전통 행사가 아니다. 소수민족 청년들의 비극적 연애사가 만들어낸 공동체의 해방구였다. 과거, 흐멍족과 자오족의 젊은이들은 부족장의 명에 따라 낯선 상대와 결혼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았다. 이를 막기 위해 한 해에 단 하루, 과거의 연인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한 공간이 사랑시장이다. 방현석은 "개인들의 내면에 미치는, 삶에 미치는 미세한 파장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이 소설을 쓰는 시간이었다"면서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작은 파장에 대해서 귀 기울여 보고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 사파의 마을과 우애 깊은 아이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치명적인 병에 걸려 그를 찾아온 임정민은 "당신에게는 아직도 괜찮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어?"라고 묻고 "난 내가 정말 사랑했던 것을 무덤 뒤의 날들로 미뤄둔 채 인생을 끝내지는 않기로 했어"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그는 미처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가 데리고 온 죽음이라는 강적이 그가 퇴치해야 할 마지막 연적이기 때문이다. 방현석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결국 함께 하는 누군가의 존재"라면서 "그 사랑의 관계야말로 혁명도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일 것"이라고 믿는다.
 

증오와 혐오와 폭력이 일상을 점령한 이즈음이다. 자고 일어나면 또 어떤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티비를 켠다. 차분하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상에 몰두하기 힘들다. 이런 나날에 사랑 이야기라니, 사치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그러한가. 사랑은, 관계에 바탕을 둔 배려는, 그리움은, 기다림은 엄중한 국면에서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관념인 것인가.

 

▲가파른 산골짜기 겹겹이 선을 그으며 층층이 올라가는 다락논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사파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의 연대기라고 방현석은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근본적으로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는 것은 고래로 찾아보기 힘들다. 혁명과 변화를 지향하는 행위의 동력이야말로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누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무엇을 위해 부나방처럼 위험을 감수하는가.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결국 그들이 보듬을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일 텐데, 그것을 향한 사랑이 그 바탕의 근본이라고 방현석은 말한다.


"세상의 거친 폭력들이 가장 위험한 것은 폭력 자체만이 아니라 그 폭력들로 인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다움에 대한 상상력들, 감정들을 빼앗겨버리는 것 아닐까 싶다. 그것이 가장 무섭다.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향기, 사람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사랑, 이런 감정들을 빼앗아가면서 오직 증오심과 혐오만을 남겨 놓는, 그래서 우리 스스로 그런 폭력 때문에 그걸 잊어버리는 게 가장 큰 손실이다. 권력 같은 것들은 회복하고 바꿀 수 있지만 한 번 빼앗겨버리고 황폐해진 감정들은 복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사파의 '사랑시장'은 관광객들을 위한 전시품으로 남고 진짜는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방현석은 2011년 아시아의 근원적 서사를 수집하기 위해 베트남 사파를 방문했고, 이곳에서 소수민족들의 '사랑시장' 이야기를 접했다. 부족장의 강권으로 모르는 남녀가 혼인을 해야했지만, 젊은 남녀들의 비극적 연애사에 숨통을 틔워주고 산악지대 노동력 확보차원에서 이들이 일년 중 하루는 '사랑시장'에서 그리운 이들을 만나 자유로운 하룻밤을 지내는 게 허용되는 시스템이었다.
 

방현석은 이곳에서 어린시절부터 엇갈린 인연으로 안타깝게 이루어지지 못한 임정민과 강석우의 '사랑시장'을 열었다. 이 남녀는 깊은 산속을 헤매어 이제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그 공간을 찾아가 '마지막' 사랑을 확인하는 감성적인 여정을 소설에 펼쳐낸 것이다.
 

-멀리서 온 그대, 구름보다 높은 산이 있는 마을에서 오셨나요, 샘물이 솟아오르는 깊은 계곡이 있는 마을에서 오셨나요? 

자오족임을 표시하는 문양의 모자를 쓴 젊은 아가씨가 던지는 노래는 사랑시장에서 주고받는 노래의 첫 구절이었다. 

-아름다운 그대, 제 마을은 아주 멀어요. 해가 아홉 번 뜰 때까지 가야 하지요. 달이 열 번 질 때까지 가야 하지요.
 

▲사파의 시장에서 어린 여인이 어린 아이를 업고 야채를 파는 중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사랑 노래에 화답하며 임정민의 고집대로, 관광상품화된 가짜 사랑시장 말고 깊은 산속의 실제 사랑시장을 향해 가는데 그들을 안내하는 흐멍족 남자의 사연이 서럽다. 일년에 하루 그 남자는 아내를 사랑시장에 데려다 주고 다음날 다시 집으로 같이 돌아가는데, 정작 남자의 사랑은 아내뿐이었으니 사랑시장에서의 하루는 그 남자에게는 사랑을 도둑맞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방현석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목가적인 풍경인데, 켜켜히 쌓여 있는 사람의 지혜들이나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것들로 사실은 층층의 다락논들 한 칸 한 칸들이 그런 사연의 연대기들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방현석이 10여 차례 방문해 머물며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던 '쩌우롱 사파호텔' 앞에 섰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임정민에게 강석우는 평생 '쉼터' 같은 존재였다. 그 남자는 정민이 결정적으로 삶의 난경에 부닥쳤을 때마다 찾아드는 순정한 공간이었다. 강석우는 그녀가 자신에게 쉬러 오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인데, 그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평범한 사랑을 넘어서는 순정 그 자체인 셈이다. 방현석은 "어떤 사람은 이 하루를 기다리며 1년을 견뎌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 하루의 힘으로 또 1년을 살아낼 것"이라고 썼다.

 

KPI뉴스 / 사파(베트남)=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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