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재계, 지금이라도 '주주 패싱' 막을 대안 내놔야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 2025-07-21 17:28:17
재계, 물적분할·유상증자 등 단기이익 집착하다 '개미' 분노 야기
"당신들이 지금 정부를 돕지 않으면 후일 우리 지원이 절실할 때 정부가 기업을 돕지 못할 수 있다."
프로이센 왕국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년)가 사회보장제도 도입에 반대하는 기업가들에게 한 말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키워 북부 독일을 통일하고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현대 독일의 기틀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는 탄압하고 강권을 휘둘러 철혈재상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데 냉혹하고 인정사정없는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근로자들에게는 따스했다.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령연금 등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다. 여러 현대 사회보장제도의 초석을 닦은 셈이다. 사회보험료를 근로자와 기업이 절반씩 부담하되 관리는 정부가 맡는 시스템도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근로자 복지 확대로 인한 비용 부담을 꺼려하는 기업을 직접 설득하거나 혹은 억압했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인정이 많아 근로자를 챙긴 건 아니었다. 그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근로자가 과격한 사상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근로자 복지가 곧 국가안보에 도움 되는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옳았다. 당시 유럽에 공산주의가 급속도로 득세했으나 독일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최근 상법 개정 후 재계의 걱정이 크다. 지난 3일 국회 문턱을 넘은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까지 넓혔다. 그러나 그 개념이 모호해 정상적인 경영활동까지 무차별적인 배임 논란과 소송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한 발짝 더 나가려고 한다. 당내 '코스피5000 특위'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자사주소각 의무화 등 '더 센' 상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을 기화로 투기 펀드들이 연합해 기밀을 유출하거나 자산 매각 요구 등 경영 간섭을 일삼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재계의 염려가 근거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전에 재계는 왜 이 지경까지 몰렸는지를 먼저 헤아려야할 것이다.
대다수 국내 기업들은 10%도 안 되는 소수 지분을 가진 '오너 일가'가 사실상 지배하는 구조다. 그런데 이사회가 오너 일가에만 충성하다 보니 대다수 주주는 무시당하는 행태가 자주 벌어진다.
상법 개정의 단초가 된 고려아연 유상증자와 두산그룹의 두산밥캣 상장폐지 추진을 비롯해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카카오그룹의 쪼개기 상장 등 사례가 수없이 많다.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은 하이브 상장 당시 대주주 지분을 일정 기간 매도하지 못하게 한 보호예수를 우회하는 통로로 사모펀드를 활용해 약 4000억 원의 수익을 남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개미'(개인투자자)들이 절망감을 느꼈겠는가. 이사회가 오너 일가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면서 대다수 주주는 피눈물을 흘렸다. 그 불만과 원성이 응축된 결과가 상법 개정, 그리고 더 센 상법 개정이다.
재계, 정확히는 오너 일가가 비스마르크 혜안을 갖춰 과도한 단기 이익 추구를 자제했다면 지금 같은 어려움은 면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명한 자들은 힘이 있을 때 자제한다. 약자들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험한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예상해서다.
기업 경영에선 분명 오너 일가가 절대적 강자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선 1400만 개미 표가 훨씬 더 많다. 재계는 그 점을 간과했다.
지금이라도 재계는 상법 개정의 부작용을 운운하기 전에 주주 패싱을 막을 대안부터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오너 일가가 자의적으로 다수 주주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효과적으로 막는 안을 제시해야 분노한 개미들을 달랠 수 있다.
KPI뉴스 /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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