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더 곪아가는 '전세'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 2024-05-29 17:45:05

사금융을 정부가 보증하는 전세대출…DSR 규제도 없어
규제 시 다수 국민 주거 질 하락…'표' 걱정하는 정부

지난 2010년 12월 결혼 후 기자의 첫 주거지는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의 전용 44㎡ 다가구주택이었다. 당시는 전세자금대출이 없던 시절이라 신혼집은 빌라나 다가구주택에 마련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내와 함께 열심히 돈을 모아 2014년 드디어 '내 집'을 마련했다. 서초구 서초동의 전용 79㎡ '나홀로 아파트'로 방 3개, 화장실 2개다. 작게나마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우리 부부는 11년째 살고 있다. 

 

처음 이사했을 때의 느낌은 감격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으며 단열과 방수도 걱정할 필요 없었다. 겨울이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덜덜 떨면서 샤워해야 했던 다가구주택과는 천지차이였다. 예전 다가구주택으로 돌아간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 도봉산에서 바라본 서울 아파트 단지. [이상훈 선임기자]

 

요 몇 년 간 전세사기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전세 그 자체의 위험성도 거론되고 있다. 전세는 사실상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사금융이다. 임차인은 그 대가로 월세 없이 거주의 편익을 누리는 것이 골자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전세 제도에 대해 들으면 "뭘 믿고 그렇게 큰 돈을 임대인에게 빌려주냐"고 황당해 한다. 사실 수억 원을 임대인에게 빌려주니 리스크가 높을 수밖에 없다.

 

전세대출 제도, 특히 정부 보증은 이 리스크를 더 심화시킨다. 정부 보증으로 임차인이 저금리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으니 당장 현금이 없는 임차인들도 대출을 받아 고액의 전세보증금을 지불한다. 사실상 정부가 위험한 사금융을 부채질하는 셈이다.

 

심지어 규제도 다른 대출보다 훨씬 더 약하다. 전세대출은 이미 다른 모든 대출에 도입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조차 받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임차인들은 소득으로 감당 못할 거액의 대출을 받아 임대인에게 빌려준다.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경우 파멸에 처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전세사기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은 모두가 안다. 전세대출에 정부 보증만 철회해도, 아니 DSR만 도입해도 리스크는 대폭 감소하리라.

 

하지만 정부는 알면서도 실천은 안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당시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전세대출에 DSR 적용을 검토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막았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 DSR까지 도입해 가계부채를 조이면서도 전세대출은 내버려두고 있다.

 

정부는 늘 취약계층 주거 안정을 내세우지만 이게 진심이라면 아파트 대상 전세대출 혹은 고액 전세대출에만 DSR을 적용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는 하지 않는다.

 

전세대출이 생긴 후 신혼부부들도 빌라나 다가구주택은 관심도 없다고 한다. 모두가 '신축'·'브랜드'·'대단지' 아파트만 찾는다. 신혼부부들만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빚을 져 임대인에게 고액의 전세보증금을 지불하면서 좋은 주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주거의 질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새 대단지 아파트들은 하나의 성이라 불릴 만큼 외부와는 단절되면서 내부적으로 각종 편의시설을 갖춰 쾌적하기 그지없다.

 

내 경험상 다가구주택과 나홀로 아파트도 주거의 질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단지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에게 정부가 "지금까지 네 분수에 맞지 않는 곳에 산 거야. 앞으로 전세대출은 네 소득으로 갚을 수 있는 정도만 받으라"며 빌라나 다가구주택으로 내몬다면.

 

갑자기 주거의 질이 뚝 떨어진 사람들에게 "전세사기 리스크가 어쩌고~~" 해봐야 통할 리 없다. 그들은 분노로 눈이 뒤집힐 것이다. 야당은 재빨리 '전세대출 DSR 적용 철회'를 내세울 테고 여당은 향후 모든 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다. 뻔히 보이는 결말이다.

 

그러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지지율'과 '표'를 걱정하는 정부가 근본 원인에 눈을 감은 채 전전긍긍하는 사이 전세 구조와 관련된 문제는 점점 더 곪아가고 있다.

 

▲ 안재성 경제산업 에디터. 

 

KPI뉴스 /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