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금융②] "담보·실적 가져오세요"…기술기업엔 여전히 높은 은행 문턱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 2026-01-05 18:09:11

작년 8~11월 中企대출 증가액 확대 '뚜렷'…위축된 가계대출과 대비
보수적 여신 태도 바뀌지 않아…"은행 특성상 어쩔 수 없어"
"은행, 대출보다 투자 진력해야"…금산분리 규제 완화 필요성도

돈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은 확연하다. 은행들은 부동산 담보대출 같은 '손쉬운 장사'보다 기업대출 등 생산적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계로 흘러가던 돈은 기업, 특히 중소기업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 흐름이 시원한 건 아니다. 돈이 흐르는 통로엔 걸림돌이 여전하다.

 

"은행 특성상 보수적인 여신 태도가 변하긴 어렵습니다. 엄연히 '은행 돈'이 아니라 '예금자 돈'으로 빌려주는 건데 위험한 곳에 함부로 대출할 순 없지요." 시중은행 여신·리스크관리 담당 임직원이나 지점장들이 하는 말은 대개 비슷하다. 상식적인 설명인데, '생산적 금융'의 팍팍한 현실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빨라지는 中企대출 흐름

 

기업대출 속도는 빨라지는 흐름이다. 5일 KPI뉴스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5대 은행 자료를 취합한 결과 지난해 초부터 7월 말까지 5대 은행 기업대출 증가액은 3조1481억 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8월에만 6조2647억 원 늘어 1~7월 증가액의 2배에 가까웠다. 이어 9월 4조1778억 원, 10월, 5조2650억 원, 11월 3조1587억 원 등 매달 큰 폭으로 기업대출을 확대하고 있다. 8~11월 중소기업대출 증가액이 13조1292억 원으로 전체 기업대출 증가액(18조8662억 원)의 약 70%를 차지했다.

 

신용·담보가 부족하더라도 벤처·중소기업의 우수한 기술력을 담보로 내주는 기술신용대출 관련 태도도 변했다. 작년 상반기 3조9264억 원 줄어든 5대 은행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7~10월 4개월 간은 6조원 급증했다. '생산적 금융' 실적으로 평가될 은행별 기업 대출 잔액 변화는 은행들이 대외적으로 밝히길 꺼려 기사에는 반영하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5대 은행 기업대출 잔액은 4조7393억 원, 중소기업대출 잔액은 2조9016억 원 감소했으나 은행 측은 "연말 특수 현상"이라고 했다. 대형 은행 기업여신 담당 임원은 "기업들은 연말 채무비율을 낮추려고 매년 12월마다 적극적으로 대출을 상환한다"며 "그래서 수치상으로만 줄었을 뿐이며 올해 1월부터 다시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계대출 흐름은 거꾸로다.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액은 지난해 6월 6조7536억 원에 달했으나 7월4조1886억 원, 8월 3조9251억 원, 9월 1조1964억 원으로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였다. 10월 2조5270억 원으로 다소 늘었지만 11월 다시 1조 원대(1조5125억 원)로 줄었다.

 

5일 KPI뉴스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5대 은행 자료를 취합한 결과 5대 은행의 지난해 말 기준 기업대출 잔액은 844조7254억 원으로 전년 말 대비 24조1028억 원 증가했다.

 

같은 기간 가계대출 잔액은 767조6781억원으로 33조5431억 원 늘었다. 주택담보대출 증가액(33조1446억 원)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돈줄을 조였음에도 주담대 증가폭이 기업대출보다 컸다. 아파트값 급등세가 꺾이지 않은 영향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은행들의 방향성은 생산적 금융이다. 지난해 11월 KB·신한·하나·우리·NH 5대 금융그룹은 향후 5년 간 생산적금융에 총 508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금융그룹별로 KB금융그룹 및 신한금융그룹 110조 원, 하나금융그룹 100조 원, 우리금융그룹 80조 원, NH농협금융그룹 108조 원이다. 주요 투·융자 분야로는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지연 인프라 등을 꼽았다.

 

담보·실적 없는 기업엔 여전히 차가운 은행

 

하지만 은행의 '생산적 금융'이 얼마나 속도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은행은 아직도 기업에 담보와 매출액 등 실적 자료를 요구한다. 여전히 보수적이고 담보·실적이 없는 기업에 차갑다.

 

▲ 은행들이 생산적금융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여신 태도가 여전히 보수적이란 지적이 나온다. [게티이미지뱅크]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벤처기업정밀실태조사'에 따르면 3만8216개 벤처기업 중 작년 은행 대출 태도가 과거보다 강화됐다고 응답한 비율이 65.3%에 달했다. 완화됐다는 비율은 1.3%에 그쳤다. 담보·실적이 없는 벤처기업들은 여전히 은행 문턱을 넘기 어렵다.

 

IBK기업은행 기업여신 관계자는 "과거에도 녹색금융, 기술금융 등을 내세워 정부가 중소기업대출 확대를 주문한 적이 여럿"이라며 "그때마다 5대 은행은 기업은행 고객에게 달려가곤 했다"고 말했다. 기업은행과 이미 거래 실적이 있는 중소기업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차주에게 대출을 실행한 뒤 정부에게 생색내곤 했으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 정보기술(IT) 분야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은행에 기술신용대출을 신청했다가 매출액, 영업이익 등 실적 자료를 요구받았다"며 "신용·담보가 부족하더라도 기술력을 평가해 돈을 빌려주는 게 기술신용대출인데 가장 중요한 평가지표가 실적이었다"고 쓰게 웃었다. 그는 "기술력이 미래 매출로 연결될 가능성을 설명해도 은행은 지금 당장 매출액이 얼마인지에만 집중했다"며 "은행에 거절당한 뒤 어쩔 수 없이 벤처캐피탈(VC)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한 대형 은행 지점장은 "생산적 금융 확대라 해도 결국 빌려줄만한 곳에 빌려주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은행은 IT 부문 2조 원, 자동차 부문 1조 원 등 각 부문별로 기업대출 총량을 관리한다. 이 때문에 담보·실적이 충분함에도 대출을 거절당한 곳이 많은데 기업대출을 확대할 경우 이런 기업들부터 먼저 빌려주게 된다는 설명이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은행연구실장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며 "은행은 자기 돈이 아니라 예금자 돈으로 대출을 실행하니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건전성 관리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부터 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조금만 연체율이 올라도 금융당국이 건전성 관리를 강하게 요구하니 은행 역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 실장은 "부실여신 발생 시 은행 내부에서 실무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도 보수적인 여신 태도에 한몫한다"고 지적했다.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위험한 곳'에 대출을 꺼린다는 설명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자금이 생산적인 분야로 본격 흘러 들어가기 위해선 은행이 대출보다 투자에 진력해야 한다"며 발상의 전환을 제안했다.

 

대출은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제한적이다. 이자수익에서 각종 비용을 제하고 나면 순이익은 매년 대출금의 1%가량에 그친다. 따라서 여신이 부실화하면 타격이 크므로 은행은 보수적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투자는 다르다. 장래가 유망한 스타트업·중소기업에 투자해 지분을 확보한 뒤 기업공개(IPO)에까지 성공하면 투자금의 몇 배를 회수할 수도 있다.

 

김 교수는 "한 곳이 실패해도 다른 곳에서 그 이상의 수익을 올리면 되니 은행이 보다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 대형 금융그룹 임원은 "생산적 금융과 관련해 직접 투자도 검토 중"이라며 "다만 은행의 투자를 활성화하려면 정부도 금산분리 등 규제를 완화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금산분리 때문에 은행의 비금융회사 출자는 의결권 지분 15% 이내로 제한돼 있다. 출자 업종도 은행 업무와 직접 관련이 있거나 효율적 업무 수행에 기여하는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사실상 규제로 손발이 묶인 상태다.

 

금융당국은 금융 연관성이 높은 핀테크 등에 한해 지분 투자를 확대 허용하는 등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는 있으나 관계부처와 협의되지 않아 아직 진전이 없는 상태다.

 

한 대형 금융그룹 임원은 "은행이 '이자장사'만 한다고 비판할 게 아니라 다른 투자할 길을 열어줘야 한다"며 "여러 모로 규제환경이 개선돼야 은행도 적극적으로 뛸 수 있다"고 강조했다.

 


 

KPI뉴스 /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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