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로 전락한 세종 손자…'왕사남' 금성대군 뒷이야기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3-11 17:24:47
유배지에서 단종 복위 도모하다 목숨 잃어
금성대군 아들, 관노로 전락해 목숨은 부지
아들까지 처형된 안평대군 사례와 대비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 관객 수 1100만 명을 넘어섰다. '왕사남'이 인기를 끌면서 등장인물의 역사 속 실제 모습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주인공인 단종과 엄흥도를 넘어 그 주변 인물들로 관심 범위가 확대되면서 관련 지자체도 움직이고 있다.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 한 금성대군(1426~1457)도 그중 한 명이다. 금성대군이 최후를 맞은 곳인 경북 영주시는 금성대군 유적 등을 둘러보는 관광 코스 운영 계획을 6일 밝혔다.
금성대군은 조선 제4대 국왕 세종의 아들이다. 세종에게는 18명의 아들이 있었다. 8명은 왕비인 소헌왕후, 10명은 후궁 소생이었다. 금성대군은 소헌왕후가 낳은 여덟 대군 중 여섯째였다. 대군 중 둘째인 제7대 국왕 세조는 금성대군보다 아홉 살 위인 동복형제였다.
단종 즉위 전까지 금성대군의 삶은 여느 왕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7세 때 금성대군으로 봉해지고, 10세 때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1세 때 혼인을 했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1437년 태조 이성계의 여덟째 아들인 이방석의 봉사손(奉祀孫)이 됐다는 것이다. 봉사손은 후사가 없는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을 말한다. 이방석은 1398년 이복형인 정안군(이방원, 훗날의 태종)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으로 인해 대가 끊긴 삼촌 이방석의 제사를 모시는 역할을 금성대군에게 맡겼다.
1452년 큰형인 제5대 국왕 문종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금성대군의 삶은 분기점을 맞는다. 보위를 이은 11세의 조카 단종은 외로운 처지였다. 이 점은 단종과 비슷한 나이에 즉위하는 제9대 국왕 성종과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1469년 왕위에 오를 때 성종은 12세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곁에는 할머니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와 어머니(훗날의 인수대비)라는 든든한 어른이 있었다. 성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희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고 인수대비가 이를 물밑에서 도왔다.
그와 달리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1441년 단종을 낳고 사흘 후, 할머니 소헌왕후는 1446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숙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든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1452년 단종 즉위 후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훗날의 세조)과 함께 왕에게 불려갔다. 숙부들은 어린 왕을 좌우에서 보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형제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왕위 찬탈로 나아갔다. 금성대군은 그런 형의 반대편에 서서 단종을 지지했다.
수양대군은 금성대군을 그냥 두지 않았다. 1455년 금성대군은 무사들과 결탁해 파당을 만든다는 혐의로 경기도 삭녕(지금의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으로 유배됐다. 얼마 후 유배지는 경기도 광주로 바뀌었다. 그해 수양대군은 세조로 즉위했다. 이듬해 금성대군 유배지는 수도에서 훨씬 먼 경상도 순흥(지금의 경북 영주시 일대)으로 다시 바뀌었다. 재산은 몰수됐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비밀리에 거사를 도모했다.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겠다는 것이었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계획이었다. 유배지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지역 유력자들을 끌어들여 대군을 조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457년 거사 계획이 조정에 누설됐다. 신하들은 세조에게 금성대군을 죽여야 한다고 거듭 청했다.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쳤다. 비슷한 시기에 단종도 목숨을 잃었다.
세조와 맞선 금성대군의 선택은 가족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금성대군의 두 아들(적자 1명, 서자 1명)은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금성대군의 적자이자 세종의 손자인 이맹한은 충청도 청주의 관노가 됐다. 그곳에서 큰아버지 세조와 그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의 노비로 살면서 이연장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이연장 역시 청주의 관노로 살아가야 했다.
제11대 국왕 중종 때에 이르러 상황이 변했다. 1518년 신하들이 중종에게 금성대군 후손을 용서할 것을 청했다. 전주이씨 연합 종친회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1519년 중종은 금성대군 후손에게 관작을 내렸다.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이맹한의 손자 이의가 대궐 문밖에 거적을 깔고 석 달 동안 호소한 것이 이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진다.
금성대군 사후 62년 만이었다. 이때까지 살아 있던 금성대군 아들 이맹한은 평생 삶을 짓눌렀을 관노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금성대군 손자 이연장은 그전에 세상을 떠나 그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왕손 핏줄이지만 노비로 태어나 노비로 살다 생을 마감한 것이다.
금성대군 후손의 이러한 모습은 세조와 맞선 또 다른 동생인 안평대군의 후손 상황과 대조적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단종 즉위 후 중신인 김종서, 황보인 등과 손잡고 수양대군과 대립했다. 1453년 계유정난 후 안평대군은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안평대군 아들 이우직도 처형됐다. 신하들은 단종을 계속 압박해 안평대군 아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오늘날 안평대군 직계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
금성대군 후손과 달리 안평대군 아들은 관노로 목숨을 부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의 경쟁 구도 등 감안해야 할 세부 요소가 여럿 있지만, 큰 흐름에서 살펴보면 시점 차이 문제를 빠뜨려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세조와 그 측근들에게 잠재적인 최대 위협은 단종의 존재 자체였다고 볼 수 있다. 왕위를 뺏겨 무력하다 해도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세조 쪽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였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무사히 성인이 되게 한다는 건 그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조와 그 측근들 기준으로는 계유정난으로 본격화된 집권 프로젝트의 끝은 세조의 즉위가 아니라 단종의 죽음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단종이 죽을 때까지 시쳇말로 피를 보며 반대 세력을 계속 제거하게 만드는 정치적 힘이 세조 쪽에서 강하게 작용하는 구조였다는 얘기다. 안평대군 아들 처형은 그 과정의 초반에 발생했다.
이와 달리 단종이 죽을 때쯤 되면 세조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은 사실상 남아 있지 않았다. 금성대군 아들까지 처형해 세조에게 '어린 조카를 또 죽였다'는 마음의 부담을 더할 정치적 이유가 별로 없었다. 처형 당시 10대 중반이던 안평대군 아들과 달리 금성대군 아들은 유아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금성대군 아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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