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전선'에서 스러져 간 이름 모를 조선 학도병·위안부
송창섭
realsong@kpinews.kr | 2023-12-22 11:31:31
"태평양전쟁에 조선인 학도병 12만 명 끌려갔다"
일본군, 버마 곳곳에 위안소 설치해 '성 노예화'
미얀마인 상당수 위안부 끌려가…현지인들도 분노
"'누구냐? 불 피우는 자는 총살에 처한다.'
1944년 4월 초순 우거진 수목 사이를 헤치며 대대장의 노발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찌르는 듯 들려왔다. 화씨 100도(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겨우 쪼그려 앉을 수 있는 구덩이 속에서 영(영국)연합군의 후퇴를 기다려 밥을 지으려다 날벼락을 맞을 뻔한 것이다."
1962년 8월 18일자 경향신문이 '8·15 전야 우리가 본 태평양 전쟁이면사-일군(일본군) 패주의 지옥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한 당시 상황이다.
기사는 버마전선에 투입된 일본군 49사단 소속 조태환 씨 등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됐다. 참전 당시 일본군 조장(소대장)으로 활동한 조씨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끌려간 힘없는 조선인이었다.
1941년 12월8일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전선을 중국에서 동남아(일본식 표현은 남방)로 넓힌다. 이 전략은 한 달 전인 11월10일 남방군(동남아 지역 담당) 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결정했다.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1910년 경술국치 때부터 1916년까지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남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을 끌어들인 진주만 공습 주역이다.
버마(현 미얀마) 공습 전략은 총 3단계로 진행됐다. 우선 남방군이 12월8일 필리핀과 말레이반도를 급습하면 다른 한 축이 현재 인도네시아 땅인 자바·수마트라 섬을 공략한다.
두 곳에 대한 공격이 마무리되면 두 부대는 남은 인력을 버마로 모아 중국과 인도를 잇는 '버마 루트'를 끊어버린다는 계획이었다. 성공하면 일본군은 영국 최대 식민지인 인도 진입과 중국 남방 거점 확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전투에는 수많은 조선 젊은이가 희생됐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등 시민단체에 따르면 남양군도, 버마전선 등에 조선인 12만 명가량이 군인으로 끌려갔고, 15만 3000명은 일본군을 돕는 군속으로 강제동원됐다.
버마전선의 참혹한 실상은 1991년 인기리에 방영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도 등장한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최대치(최재성 분)가 며칠 동안 굶어가며 빠져나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곳이 바로 버마전선이다. 기어가는 커다란 왕뱀을 산채로 뜯어 먹는 장면은 당시 화제가 됐다. 그만큼 전장은 치열했다.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Mandalay)는 교통의 요충지다. 미얀마 마지막 왕조 수도였던 만달레이에서 궁성은 가장 중요한 관광명소로 꼽힌다. 2년 전 쿠데타 직후 군부는 반정부 세력 테러를 이유로 주요 관광지 문을 걸어 잠갔다. 궁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소요가 안정되면서 최근 궁성은 다시 일반인 출입이 가능해졌다. 출입을 위해선 출입 전 소총을 찬 무장군인으로부터 신원 확인을 받아야 한다.
일본군 입장에서 만달레이는 인면(印緬‧인도-미얀마)전선의 베이스캠프다. 여기서 최전선으로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1942~1945년 이 역할은 만달레이에 주둔한 제5야전수송부가 책임졌다. 제5야전수송부는 1943년 제2야전수송부가 추가 투입되기 전까지 이 모든 역할을 혼자 도맡아 했다.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저자 하종문 한신대 일본어과 교수는 책에서 "제5야전수송부와 제2야전수송부가 기록한 진중 문서에 위안소 규정이 자세히 담겨져 있다"고 밝혔다.
당시 만달레이에 만들어진 위안소는 일본군과 군무원이 이용했다. 하 교수는 "경우에 따라 만달레이 거주 일본인에게도 개방했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인면전선에서 전투가 한창 전개되던 1943년 10월 만달레이 시내에는 미얀마인 위안소 3곳, 일본인 또는 조선인 위안소 2곳이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는 1945년 1월 위안소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특히 조선인 위안소는 3곳이나 늘어났다. 중국, 미얀마인 위안소는 각각 1곳씩 새롭게 문을 열었다. 만달레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사가잉(Sagaing) 지역에도 조선인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훗날 공개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44년 기록된 한 일본군 진중일지에는 일본군 병사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일지에서 그는 "당시 위안소가 이용객들로 초만원이었다"라고 진술했다.
일본군이 점령지마다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미얀마 국민도 똑똑히 알고 있다. 만달레이에서 만난 미얀마인 존 프윈트 퓨(Zon Pwint Phyu)는 "당시 버마 여성 상당수가 위안부로 활동했는데 지금 일본 정부는 개인의 돈벌이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만달레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핀우륀(Pyin Oo Lwin)은 미얀마 최고의 휴양지로 꼽힌다. 해발 700~1000미터 사이 도시가 있어 연중 내내 선선하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군 미얀마 사령관 제임스 메이 이름에 '도시'를 뜻하는 묘(Myo)를 붙여 메이묘(May-myo)라고 불렀다. 직역하면 '메이의 도시'란 뜻이다.
선선한 기후 때문에 예전에는 영국인, 지금은 미얀마인 사이 최고의 휴양지로 꼽힌다. 핀우륀 중심을 차로 이동하다보면 서양식 고급 별장이 종종 눈에 뛴다. 하나같이 미얀마 부유층 소유다.
일본인 방송기자 세가와 마사히로는 미얀마 전역을 둘러본 뒤 펴낸 책 '버마와 미얀마 사이에서'에서 이곳을 '버마의 가루이자와'라고 칭했다. 가루이자와는 일본 도쿄 근교에 위치한 고급 별장지다. 영국, 인도 연합군과 상대한 일본군 제15군 총사령부는 당시 핀우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에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엘리트 군 간부를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를 이곳에 세웠다. 지금도 미얀마 육사는 핀우륀에 있다.
당시 핀우륀에는 다수의 위안소가 있었다.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 자료에 따르면 핀우륀에는 총 8개의 위안소가 있었고 그중 5개가 조선인 위안소였다. 세가와 마사히로는 책에서 "현 핀우륀 공무원 숙소가 바로 당시 조선인 위안소"라고 설명했다. UPI뉴스 취재진이 9월25일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제15군 총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던 미얀마 육사 부지는 보안상 이유로 현장 접근이 불가능했다. 2년 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사전 허락 없이 출입, 취재는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KPI뉴스 / 만달레이, 핀우륀(미얀마)=탐사보도부 송창섭 기자 realson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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