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학살 증폭한 4·3 계엄 끌어댄 윤석열 측 궤변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1-14 16:52:55

내란 우두머리 혐의 결심 공판서 4·3 계엄 등 소환
불법 논란 4·3 계엄, 학살 등 국가 폭력 피해 급증
몽테스키외와 갈릴레이 인용한 부분도 억지 논리

지난 9, 13일 진행된 12·3 내란 결심공판(재판장 지귀연)은 국회 풍경과 흡사했다. 내란범 변호인단의 변론은 국회에서나 보던 필리버스터를 방불케 했다. 그 시간 끌기 전략엔 '역사'와 '철학'이 동원됐는데, 고개를 끄덕일 만한 논리는 단 한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억지와 궤변의 연속인 '아무말대잔치' 수준이었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변호인 배보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소환했다.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주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지만 (그에 대해) 사법 심사를 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선포는 고도의 통치행위로 사법 심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4·3사건 관련 계엄을 끌어댄 것이다. 

 

배 변호사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도 소환했다. 몽테스키외의 삼권 분립 이론을 인용하며 계엄 선포가 사법 심사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변호인 이동찬은 16~17세기 이탈리아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소환해 "다수가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궤변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사례들이다. 우선 4·3사건 관련 계엄은 위법 논란이 있는 계엄이었다는 게 학계와 언론계의 중론이다. 1948년 7월 탄생한 제헌 헌법에는 "대통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제64조)라고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해 11월 17일 대통령령으로 이 계엄을 선포했다. 계엄법은 그 이후인 12월에야 초안이 제출돼 이듬해 11월 제정됐다.

무엇보다 4·3계엄은 국가 폭력에 의한 학살을 가속화한 계엄이었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에서 계엄령은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주민 희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학살은 계엄 전 시작됐지만 계엄 선포 후에는 학살 강도와 규모, 범위 면에서 그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강경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는 초토화됐다. 이 사건 희생자가 대부분 이 시기에 발생했다.

11월 중순 이전엔 젊은 남성이 주로 희생된 데 비해 강경 진압 시기엔 토벌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보고서는 "계엄령이라는 이름 아래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재판 절차도 없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동족을 총살"했다고 명시했다.

이처럼 4·3사건 관련 계엄은 불법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다 국가 폭력 피해를 키운 반면교사 사례다. 이런 역사적 과오를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 비호에 끌어다쓰다니, 얼토당토않은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몽테스키외를 소환한 것도 억지스럽다. 삼권 분립의 기본은 견제와 균형이다. 대통령 윤석열은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침탈했다. 내란이 성공했다면 삼권분립이라는 말도 꺼낼 수 없는 사회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을 두둔하기 위해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이론을 동원하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갈릴레이를 끌어댄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 연구에 매진했고 그 과정에서 종교 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와 친위 쿠데타에 실패해 몰락한 윤석열을 비교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12·3 내란이 그렇듯 변호인단의 비유도 가히 폭력적이다. 

 

▲ 김덕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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